복달임 ‘국룰’은 인삼주 아니었어?…삼계탕과 잘 어울리는 의외의 술 [전형민의 와인프릭]

전형민 기자(bromin@mk.co.kr) 2023. 8. 5.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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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가 지나가고 전국 대부분 지역 낮 최고기온이 35℃를 오르내리는 무더위가 시작됐습니다. 일찍이 조상들이 입술에 붙은 밥알도 무겁다는 속담을 남겼을 정도로 더운 날씨가 이어지면서, 견디기 힘든 피로가 누적되는 시기죠.

옛부터 조상들은 이 시기를 삼복이라 불렀습니다. 복(伏)은 한자로 사람 인(人)과 개 견(犬)을 붙여놓은 모습인데요. 사람이 더위에 지쳐 개처럼 엎드려 있는 형상입니다. 고대 중국에서 기원한 오행설에서 여름은 화(火), 가을은 금(金)으로 표시하는데, ‘계절 막판 여름의 불기운에 가을이 세 번 굴복한다’고 해서 삼복(三伏)이라는 말이 생겼다고 합니다. 자연의 섭리인 계절의 변화조차 잠시 기세를 꺾을 정도로 더운 시기라는 뜻입니다.

조상들은 삼복을 잘 나기 위한 슬기로운 풍습을 만들어 지켜왔습니다. 초복, 중복, 말복으로 날을 정하고, 그때마다 마련한 음식과 술을 근처 시원한 계곡 등에 가져가 천렵 등을 즐기며 먹고 마시는 복달임입니다. 살인적인 더위를 거스르며 일을 하기보다, 차라리 적절한 휴식을 통해 지친 체력과 기력을 회복하고 환경에 적응하려는 조상들의 지혜였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시대와 지역에 따라 복달임에 사용하던 음식과 술은 바뀌어왔습니다만, 풍습을 이어온 목적은 같습니다. 무더위에 지친 심신의 적절한 재충전이죠. 그렇기 때문에 이 때 먹는 음식을 현대에서는 보양식이라고 부릅니다. 오늘은 무더위를 견디게 해줄 우리가 주로 먹고 있는 보양식과 어울리는 와인들을 준비해봤습니다.

조선후기에 활동한 도화서 화원, 김득신의 풍속도화첩 중 강상회음. 햇볕이 따가운 한여름, 장정들이 강가 그늘에 모여 천렵을 즐기고 밥을 먹는 모습을 그렸다. 간송미술관 소장.
모두의 보양식, 삼계탕엔 비오니에 ‘안성맞춤’
매년 복날이 돌아오면 우리 한국인의 머릿속에는 십중팔구 한 가지 음식이 떠오릅니다. 푹 고아낸 진한 육수와 달큰하면서 쌉쏘름한 한약재향, 쫄깃하고 야들한 백황색 닭고기가 뚝배기에 다소곳하게 담겨진 음식, 삼계탕입니다.

닭을 이용한 음식은 세계 보편적이지만, 국물 음식에 닭의 형태를 유지하고 귀한 약재였던 인삼 등을 넣는 삼계탕은 그 차별성 때문에 세계적으로 우리의 독자적인 음식 문화로 널리 인정 받고 있습니다.

우리 역사에서 삼계탕의 연원도 생각보다 깊습니다. 조선 전기 출간된 식료찬요(食療纂要)에는 ‘출산 후 몸이 허해졌을 때 생백합(나리꽃) 3개와 멥쌀 반 되를 버무린 다음 닭 속에 넣고 삶아 익혀 먹으라’고 적혀있습니다. 종이가 귀하던 시대에 출간된 책에도 들어갈 정도로 당시 성행했던 음식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삼계탕의 연원은 아무리 늦게 잡아도 조선 전기 이전이라는 설명이 따릅니다.

삼계탕에는 으레 인삼주가 따르는데요. 사실 인삼주와 삼계탕은 맛으로는 그리 좋은 궁합이 아니라고 합니다. 소주 베이스의 인삼주는 쓴맛이 부각되기 때문에 삼계탕 특유의 한약재향과 담백한 닭고기를 즐기기엔 아쉽다는 평가죠.

비슷한 이유에서 와인 전문가들은 삼계탕과 와인의 페어링에는 떫은 맛을 유발하는 탄닌이 많은 레드와인보다 화이트와인을 추천합니다. 비오니에(Viognier)나 게부르츠트라미너(Gewurztraminer) 품종으로 만든 화이트와인이 안성맞춤으로 꼽힙니다. 특유의 유질감과 이국적인 꽃향기, 미세한 과일향과 단맛이 자칫 심심할 수 있는 담백한 닭고기와 잘 어우러진다는 평가입니다.

레드와인이지만 탄닌이 적고 과실미가 화려한 가메(Gamay)나 돌체토(Dolcetto) 품종의 와인도 와인러버들이 주로 찾는 조합입니다. 레드와인의 향신료 풍미가 삼계탕 특유의 한약재향이 나는 국물과 잘 어울릴 뿐더러, 닭의 누린내를 잡아주고 육질까지 부드럽게 해주거든요.

여기에 더해 레드와인에 많이 들어있는 폴리페놀(Polyphenol)이 삼계탕의 콜레스테롤이 소화관으로 흡수되는 것을 막아 주기 때문에 혈중 콜레스테롤의 수치를 낮춰주기도 합니다.

복날 대표 보양식으로 잘 알려진 삼계탕. [사진=연합뉴스]
생선인가, 고기인가…스테미너의 제왕 장어엔?
스테미너의 제왕으로 알려져있는 장어도 보양식을 꼽으라면 빠지지 않는 메뉴입니다. 특히 달짝지근한 간장 소스에 발라 잘 구워진 장어구이는 무더위에 달아난 입맛을 돌아오게 해주는 별미로 인기가 좋습니다. 장어는 생선이면서도 특유의 기름진 느낌 때문에 종종 고기처럼 여겨지는 장어의 특성과 달고 짠 두 가지 강한 맛이 어우러지는 소스로 인해 와인 페어링이 어려운 음식으로 손꼽힙니다.

전문가들은 로제 샴페인을 대안으로 제시합니다. 아름다운 분홍빛으로 자신을 뽐내는 로제 샴페인은 단순히 샴페인에 레드 와인을 섞어 색만을 낸 와인이 아닙니다. 로제 자체로도 하나의 와인 카테고리로 인정받을 만큼 훌륭한 맛과 향을 자랑하는데요. 붉은과실미를 느낄 수 없는 샴페인에 옅지만 적당한 구조감과 붉은과실 뉘앙스를 부여해줍니다.

장어 요리에 샴페인을 곁들인다면, 샴페인 특유의 높은 산도와 자글거리는 기포가 장어의 기름기를 잘 잡아줄 뿐만 아니라, 으레 장어 요리에 함께하는 생강 등 강한 향신료 풍미에도 와인이 주눅 들지 않습니다. 여기에 효모 숙성(Sur lee)을 통한 샴페인 본연의 빵을 굽는듯한 토스트 풍미는 장어 요리에 다채로운 풍미를 입혀 상승작용을 일으켜주죠.

보통 레드와인의 탄닌이 생선의 비린 느낌을 자극하는 것에 비해, 로제 샴페인은 껍질과의 아주 절제된 접촉 방식(Saignee·사혈법)으로 생산해 구조감과 붉은과실미라는 이점만 잘 갈무리해낸 하이브리드 와인인 셈입니다.

스테이먼의 제왕으로 알려진 장어도 여름철 대표 보양식으로 손꼽힌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오리고기, 추어탕에도 맞는 와인이 있을까?
오리고기도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보양식입니다. 오리는 사실 우리나라보다 서양에서 더 많이 키우고 잡아먹는 가금류죠. 그러다보니 오리고기와 와인의 매칭은 비교적 잘 알려져 있고 다양합니다.

특히 프랑스인들은 오리고기와 피노누아(Pinot Noir)를 주로 마리아주 하는데요. 닭고기보다는 살짝 짙은 육향을 피노누아 특유의 체리, 딸기 같은 산뜻한 과실미가 잘 어우러집니다. 다만, 피노누아의 섬세함을 압도하는 훈제 요리라면 피노누아보다 좀 더 짙은 과실미와 오크향을 보여주는 묵직한 레드와인을 고르셔야겠습니다.

추어탕은 소화가 잘되는 양질의 단백질과 다양한 영양소가 골고루 들어있는 건강식입니다. 비단 삼복 더위 뿐만 아니라 1년 내내 사랑 받는 보양식인데요. 진한 국물과 강한 맛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에 묻히지 않으면서 부드러움과 산도가 잘 느껴지는 레드 와인을 골라야 합니다.

스페인의 뗌프라뇨(Tempranillo)로 만든 리제르바(Reserva)급 와인이 잘 어울린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스페인에서 리제르바급 레드와인은 최소 36개월 숙성(오크 숙성 12개월 이상)을 해야 하는데요. 제법 오랜 시간 오크통 숙성을 거치면서 부드러운 무게감을 가미했음에도, 여전히 매력적인 산도를 보여줘 추어탕과 좋은 조합을 보여줍니다.

와인 문화권이었던 서양에서도 자주 먹는 오리고기는 피노누아와 잘 어울린다. [사진=연합뉴스]
정답이 없는 페어링…맛있게 먹고 싶다는 욕망
와인과 음식의 조합을 영어로는 페어링(Pairing), 프랑스어로는 마리아주(Marriage)라고 합니다. 각각 해당 언어권에서 조합을 뜻하는 어원이 됐을 정도로 핵심적인 단어인데요. 그만큼 인류가 음식과 음료의 조합에 관심이 많았다는 뜻으로 풀이됩니다.

와인 문화권이 아니었던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치킨과 맥주를 뜻하는 ‘치맥’, 삼겹살과 소주를 뜻하는 ‘삼쏘’, 하나의 공식처럼 굳어진 ‘막걸리와 전’처럼 알고보면 우리도 음식과 음료의 조합을 중요시 여기는 민족이죠.

과거 인류에게 생존이라는 목적을 부여했던 먹는다는 단순한 행위가 현대에 와서는 즐거움과 행복을 위한 행위가 됐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개개인의 즐거움과 행복이 모두 다른 가치관에 있는 것처럼, 음식과 음료의 조합 역시 철저히 개인적인 의견일 뿐이라는 점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아직 삼복 중 가장 극성이라는 말복이 남았는데요. 위에서 소개해드린 조합도 좋고, 전혀 별개의 독창적인 조합도 좋습니다. 올해 말복에는 전통 보양식과 와인을 함께 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와인은 시간이 빚어내는 술입니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 와인의 역사도 시작됐습니다. 그만큼 여러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품고 있는데요. WSET(Wine & Spirit Education Trust) 국제공인레벨을 보유한 기자가 재미있고 맛있는 와인 이야기를 풀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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