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질문인데 숙의 거친 뒤 생각 변화… ‘숙고된 여론’ 도출 [심층기획-주목받는 공론조사]
처음엔 ‘의원 수 확대’ 응답 13% 불과
숙의 이후엔 33%로 크게 늘어나 주목
‘단순 응답’ 기존 여론조사 보완 가능
정치권선 결과 반영 놓고 갑론을박
경실련 “정당 이해관계 따라 왜곡 말라”
전문가 “최종 결정은 정치가 하는 것”
첨예 대립 사안 등에 활용 가능성도
국회의원 선거제도 개편을 위한 공론조사 시민참여단에게 숙의 전후로 같은 질문을 던졌다. 숙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시민참여단 469명 중 ‘지금보다 늘리는 것이 좋다’는 의견은 13%에 불과했다. 65%가 ‘지금보다 줄이는 것이 좋다’를 택했다. ‘지금 이대로가 좋다’의 비중도 18%였다. 83%가 국회의원 정수 확대에 찬성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패널토의, 전문가 질의응답, 분임토의 등 숙의 과정을 거친 시민참여단의 생각은 달라졌다. 확대해야 한다는 답변은 33%로 늘어났다. 축소해야 한다는 의견은 37%로 크게 줄었고, 현행 유지를 택한 이들도 29%였다. 확대와 축소가 52%포인트 격차에서 4%포인트 차이로 크게 줄어들면서 숙의 전후가 큰 차이를 보인 것이다.
4일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에 따르면 시민참여단 469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현재 의원 정수를 유지한다고 가정했을 때 ‘비례대표를 늘려야 한다’는 응답은 지난 1∼3일 숙의 전 조사에서 27%에 불과했지만, 숙의 후에는 70%로 대폭 늘었다. 숙의 전후를 비교했을 때 ‘지역구를 더 늘려야 한다’는 의견은 46%에서 10%로 크게 줄었다. 현행 유지는 16%에서 18%로 비슷한 수준을 나타냈다.
국회 정개특위가 진행한 이번 공론조사는 권역별, 성별, 연령별로 비례 배분해 모집한 500명의 시민참여단이 자신의 거주 지역과 인접한 KBS 본사나 4개 지역총국에서 모여 토론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공론조사 의제는 △선거제도 개편의 원칙과 목표 △지역구 국회의원 선거구의 크기 △비례대표 국회의원 선출 방식 △지역구 비례대표 의석 비율과 정원 정수 등이다.
다만 이번 공론조사 결과가 실제 선거법 개정에 반영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여당이 내세우고 있는 의원 정수 축소는 숙의 전 조사 결과와 결이 같다. 지난 6월20일 국민의힘 김기현 대표는 국회 교섭단체 연설에서 ‘국회의원 10%(30명) 감축안’을 제시했다. 특히 국민의힘은 지역구가 아닌 비례대표 의석을 축소하는 방안을 고려 중인데, 이 역시 공론조사 결과와 반대되는 방향이다. 정개특위 회의에서도 여당 의원들은 공론조사의 편향성이나 설계 오류를 주장했고, 이후 여야의 선거제 개편 합의 역시 지지부진한 상태다.
이에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은 선거제 개편에 대한 공론조사 결과를 정치권이 왜곡하려 한다고 비판했다. 경실련은 “공론조사에서 대표성과 비례성 강화를 위한 선거제도 개혁이 필요하다는 민심이 확인됐다”며 “정당 이해관계에 따라서 조사 결과를 왜곡하지 말고, 선거제도 개혁을 추진할 것을 촉구한다”고 지적했다. 채진원 경희대 공공거버넌스연구소 교수도 “숙의의 공론조사를 거쳤더라도 이번 경우처럼 결과를 자기식으로 해석해 버리면 문제가 된다”면서 “책임 있는 자세라면 이번에 나온 결과를 ‘제4안’으로 보고 전원위 회부 등 해당 안에 대한 결정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동안 논의가 공회전했던 개헌 문제나 정치권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사안 등에 공론조사가 활용될 가능성도 있다. 최근 야당은 KBS 수신료 분리 징수 추진에 대해 국회의장 산하 ‘수신료공론화징수위원회’ 구성을 제안한 바 있다. 채 교수는 “(공론조사) 참여자들을 잘 선택해야 하는 문제가 있지만 국회에서 나오는 안과 민의가 일치하는지를 확인해 보고, 부족한 부분을 보완할 절차적 정당성을 만들 수 있는 게 숙의 공론장의 장점”이라고 했다.
다만 공론조사가 정책결정권자나 대의기관이 책임을 회피하는 용도로 사용될 수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김 소장은 “지금까지 공론조사를 살펴보면 원전, 교육, 핵폐기물, 선거제 등 정치인들이 ‘하면 욕먹을 것 같은’ 주제들을 국민에게 떠미는 식이었다”고 평가했다. 박 교수도 “어려운 문제들에 대해 일종의 ‘외주’를 하는 것으로 볼 수 있고, 실제 시민들의 뜻을 반영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공론조사는 매력적인 모델”이라면서도 “공론조사가 절대 대의민주주의를 대체할 수 있다거나 만병통치약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공론조사가 대의제의 한계를 보완하는 제도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지금처럼 사안에 따라 한시적으로 운영되는 공론조사나 공론화위원회를 하나의 기구에서 관리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공론화위 상설화 가능성은 신고리 5·6호기 건설 중단 이후 문재인정부에서 한때 제기되기도 했다. 김 소장은 “공동체의 미래를 위해 공론조사의 의제나 절차 등을 논의할 수 있는 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며 “책임 회피를 방지하기 위해서도 의제의 선택부터 국민의 손으로 할 수 있는 체계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해외에서도 주요 국가 정책 결정을 두고 공론조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대부분 ‘숙의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보여 줬지만, 공론조사의 특성상 조사 결과가 즉각 구체적인 정책이나 법안으로 이어지지 않은 경우가 많다.
4일 국회입법조사처의 ‘시민참여 공론화 해외사례와 시사점’ 보고서에 따르면 기존 해외 공론조사 사례는 현실 정치와 관계 정도에 따라 다양한 결과를 보였다. 2006년 핀란드의 원전 건설 공론조사는 집단 숙의에서 공동성명서를 발표해 시민들이 원자력 발전과 관련된 가치와 사실관계를 분석하고 합의를 찾도록 했다. 이는 공론조사를 통해 합의하는 절차에서 공동성명서 발표가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결론을 냈지만, 실제 정책 결정에 미친 영향력은 미미했다.
2011년 벨기에는 사회·정치적 갈등을 극복하기 위한 ‘G1000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무작위로 선택된 시민의 의견을 취합해 시급한 정책을 선별하고 제안하는 것이 목표였고, 최종적으로 ‘벨기에 사회의 노동과 실업문제 개선 방안’에 대한 권고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하지만 이는 일부 의원에게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되면서 권고 사항이 현실 정치에 반영되지는 못했다.
프랑스·영국·스코틀랜드·덴마크 등에서 시행한 기후 시민의회처럼 의회나 정부가 정책 수립에 앞서 공론조사를 주도적으로 실시한 사례도 있다. 우리나라의 공론조사도 대체로 여기에 해당한다. 다만 프랑스의 기후 시민총회가 정부에 제출한 149개 권고안 중 실제 입법 과정에서 15개만 채택된 것처럼 공론화 단계의 권고 사항이 실제 법령으로 전환된 비율은 높지 않았다.
보고서는 해외 공론조사 사례를 분석한 결과 △공론 참여자 다양성 확보로 인한 대중적 참여 동기 유발 △논의 쟁점에 대한 충분한 정보 제공 △공론화 결과의 정책 반영을 위한 입법 절차 확보와 같은 조건이 충족될 때 공론조사와 공론화의 효능감이 높았다고 평가했다.
유지혜·최우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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