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천장은 어디든 깨져야 한다 [편집인의 원픽]
기사에도 소개됐지만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의 유리천장 지수(glass-ceiling index)는 대한민국이 G8(주요 8개국) 승격을 지향하고 세계 10대 경제선진국이라는 현실을 무색케 한다. 이 지수는 세계 여성의 날(3월8일)을 기념해 매년 발표되는데 한국은 11년째 조사 대상 29개국 가운데 꼴찌다. 여성의 노동참여율, 성별임금 격차, 관리직 및 의회직 여성 비율 등 여러 지표에서 최하위권이다. 고학력 여성들은 늘어나는데 임금, 육아 등에서 불이익을 받으니 노동참여율이 떨어지고 기업내 관리직 비중도 소수에 그치는 악순환이 되풀이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창업 현장에서는 어떨까.
◆“질염은 뭐? ‘갱년기가 왜?”
“사업 발표를 할 때 여성 심사역이 있으면 정말 감사하죠. ‘질염이 뭐냐면요’부터 설명할 필요가 없어지니까요.” 질 미생물 검사 서비스 체킷을 운영하는 박지현 쓰리제이 대표의 말이다.
“여성 갱년기는 돈 있으면 해결되는 거 아닌가요.” 여성스타트업 포럼의 이정희 의장이 투자설명회 자리에서 들은 남성 심사역의 말이다.
여성 건강, 질환 등과 관련한 사업이다보니 투자 유치를 위한 자리에서 처음 부딪히는 게 ‘젠더 장벽’이다. 월경이나 피임, 질염, 출산과 관련해 여성들이라면 누구나 평소 느꼈을 문제를 남성들이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여성 창업가들은 투자 심사 단계에 여성들의 참여 비중을 늘려야한다고 한 목소리로 말한다.
팸테크 산업 뿐 아니라 일반 창업 과정에서도 여성들은 성차별적인 질문에 노출되기 십상이다. “결혼하면 회사 운영은 어떻게 할 건가” “출산하면 애는 누가 보나. 회사는 어떻게 되나.” 식의 질문이다. 시장조사기관 피치북에 따르면 “투자자들이 주로 여성 창업자에는 ‘리스크’ 요인을 묻는 반면 남성 창업자에게는 ‘성장’ 요인을 질문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신생 사업에 대한 정부 규제도 이들에게는 벽이다. 월경컵 등 여성 위생용품을 판매하는 윤송이 티읕 공동대표는 “식약처에서 인허가를 계속 보류했다. 국내 크라우드 펀딩 전에 미국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에서 먼저 출시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고 했다.
중소벤처기업부에 따르면 예비유니콘 선발 사업에서 평가위원 15명 중 여성은 1명, 60명으로 구성된 국민평가위원회에서 여성은 10명이었다. 심사위원 성비가 선발 기업에 영향을 미치는 지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공교롭게도 지난달 발표된 최종 15개 예비유니콘 가운데 여성 기업은 없었다. 업력 7년 이내 창업기업을 대상으로 글로벌 시장 개척자금 등을 지원하는 아기유니콘 사업 평가위원회와 신산업 스타트업 육성 사업을 평가하는 위원회에는 여성 비중이 20∼30%에 이른다.
여성 창업가들은 그동안 남성 위주로 구성된 심사·평가위원회부터 평평해질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정부의 관심도 필요하다. 벤처캐피털 옐로우독의 정주원 투자심사역은 “여성이 남성보다 의료비를 약 15% 더 쓴다고 알고 있는데 전체 의료 연구 중 여성의 몸을 특정해 연구하는 비율은 4% 밖에 안된다”면서 “팸테크와 관련한 정부의 연구 지원이 더 필요하다”고 했다.
스타트업 미디어인 스타트업레시피가 발표한 ‘투자리포트 2022’에 따르면 2021년 기준 투자유치 총 1480건 가운데 여성 창업자가 투자를 받은 건수는 120여 건(14.8%), 투자금은 4947억원으로 전체 10조 8271억원의 4.6%에 그쳤다. 미국에서도 글로벌 경기가 침체되면서 여성 창업자들의 투자 유치 실적이 유독 나빴던 것으로 알려졌다. 피치북 데이터에 따르면 올 상반기 미국 여성 창업 스타트업이 유치한 투자금은 14억 달러(약 1조7990억원)로 전년 동기 54.8% 떨어졌다.
몇 년 전 한 브런치 행사에서 ‘유리동물원’이라는 단어를 처음 접했다. 유리동물원은 2012년 영국의 스텔라 크리시 하원의원이 한 여성 언론인 모임에서 언급한 표현이다. “내 생각에 우리는 평등사회의 약 20% 목표점에 도달했을 뿐인데 사람들은 이를 근거로 ‘이 정도면 충분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이제 여성 의원들도 늘었으며 언론계에도 여성들이 꽤 있다. 이제는 유리 천장이 아니라 유리동물원이 됐다. 어디를 가든 ‘오, 저런 자리에 여성들이 있네!’ 이렇게 됐다. 하지만 같은 여성들이 자리만 바꾸고 있을 뿐이다.”( ‘여성과 저널리즘’, 명인문화사)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과거에 비해 늘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몇몇 직역이나 고위직급에는 소수의 여성들뿐인 현실을 지적한 말이다. 일반 기업에 비해 비교적 자유롭고 유연성이 느껴지는 스타트업계에도 여성 창업가들이 넘어야할 산은 꽤 높아 보인다. 저출산 고령화 시대에 국가 경쟁력을 키우려면 여성의 경제 활동 참가율이 더 높아져야한다는데 ‘장벽 낮추기’가 스타트업계만의 과제는 아닐 것이다.
-이 기획 기사를 쓰게 된 계기가 있나.
“체킷 서비스를 운영하는 박지현 쓰리제이 대표를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는데 현 정부에서 여성 기업 대상 지원 사업이 줄었다고 했다. 중기부에 확인해보니 사업 규모 자체가 줄지는 않았는데 현장에서 제대로 실현되지않는 것 같았다. 여성 창업가들에게 투자 유치가 가장 중요한 데 투자 심사 단계에 여전히 ‘유리천장’이 있다는 생각에 취재하게 됐다.”
-현실적으로 투자 심사·평가위원회에 남성들이 많은데 어떤 문제가 있나.
“사업에 대한 이해도가 낮다는 것이다. 취재한 여성스타트업 포럼 대표 말로는 최근 여성 기업 대상으로 한 투자경진대회에서 워킹맘 대상의 사업 아이템이 1등을 했다고 한다. 이런 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경진대회 심사위원으로 많은 여성이 참여했기 때문이다. 여성 고민을 해결하는 사업에 대한 수요도 많아지고, 그런 아이디어도 늘고 있는데 이를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심사위원회의 성별 안배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성별 안배를 떠나 다양성이 보장돼야 더 혁신적인 사업 아이템이 나올 수 있다.”
-투자심사의 ‘기울어진 운동장’ 지적에도 쉽게 바뀌지 않는 이유는.
“여성 창업가들은 2020년부터 이런 문제를 지적해왔다. 정부도 여성 기업 차별이 없도록 심사 또는 평가위원 구성에 여성 위원을 30% 이상 포함한다는 기본계획을 만들었다. 정부측에서는 이공계 여성 인력이 적다보니 그 풀(pool)을 채우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하지만 심사위원장 등 실제 투자를 결정하는 직급이 대부분 남성들이어서 풀을 채운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닌 것 같다.”
“질염이 뭐냐면요…” 스타트업 女 창업자 투자 심사부터 ‘장벽’ [심층기획-스타트업 유리천장]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730507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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