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여쁜 곰돌이 눈에 빨간 불이 켜질 때, 일상은 지옥과 마주한다 [정양환의 데이트리퍼]
만화를 통해 세상을 보려 합니다. 1965년 비틀즈 싱글 곡 ‘데이트리퍼(Day tripper)’는 “당일치기 여행자”를 일컫습니다. 만화를 본다는 건 잠깐 일상을 벗어나는 여행이니까요. 브라질 그래픽노블 ‘데이트리퍼’도 영감을 줬습니다. 이 만화엔 삶을 담는 소설가를 평생 꿈꾸지만, 실상은 죽음을 알리는 부고(訃告) 담당 기자가 나옵니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 우리네 인생과 무척 닮지 않았나요. |
지난해 12월부터 네이버에서 연재하는 웹툰 ‘에브리띵 이즈 파인(Everything Is Fine)’은 어딘가 일그러진 프리즘 같은 만화다. 눈앞에 근사한 무지개를 환히 비춰주지만, 실상은 왜곡과 분열이 남긴 허상일 뿐. 제목과 달리, 겉은 멀쩡해 보여도 속은 뭐 하나도 괜찮지 않은 일상. ‘디스토피아 스릴러’라는 작가 마이클 베첼의 소개가 딱 맞춤한 작품이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그의 말마따나, 만화는 감시와 인질이란 쇠구슬을 주렁주렁 발목에 매단 ‘보통사람들’을 비릿하게 그려낸다. 화사한 2층집에서 도덕교과서에나 나올 말과 행동을 주고받는 그들은, 불변의 미소를 머금은 곰돌이 탈 아래 속내를 감춘 채 하루하루를 반복한다. 길목마다 빽빽이 들어선 감시카메라는 우리를 지켜주는 감사한 존재라 믿는 척하며. 그리고 그 마을엔, 어느 집에도 ‘아이들’이 없다.
이 작품은 보면 볼수록 친숙하면서도 독특하다. 그간 미국 대중문화가 자주 꺼내먹던 ‘중산층 신화(주류 백인사회)’란 소재를 여실히 차용하면서도 꽤나 이질적인 변주로 빚어낸다. 한때 ‘워라밸’의 표상으로 여겨지던 미 중산층을 상징하는 요소는 듬뿍 가져오되, 어떤 표정도 읽을 수 없는 ‘탈’이란 장치를 심어놓아 내재된 불안과 갈등이 흐릿하게 배어나도록 만든다. 더욱이 만화의 장르적 특성인 ‘소리의 부재’는, 친절하지 않아서 창의적인 작가의 화법과도 절묘한 앙상블을 이루며 쫄깃한 질감의 긴장을 선사한다.
예를 들어, 디즈니플러스 드라마 ‘완다비전’(2021년)은 중산층 신화를 과거에 박제된 환상으로 소재 삼았다. 최근 개봉한 영화 ‘바비’는 아예 자본주의와 남성중심사회가 낳은 왜곡된 조작으로 평가 절하한다. 심지어 바비에선, 관점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를 취향이나 선택의 문제로 격하시켜 ‘주류’의 타이틀까지 반납하라 요구한다.
그런 맥락에서 ‘에브리띵…’은 그만한 급진성은 부족하나,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방식으로 이 신화를 파고든다. 빅 브라더가 만든 계급사회와 그에 대한 대항이란 ‘스타워즈’ 구도다. 이는 언제나 그렇듯, 피아를 명확히 구분지음으로써 ‘편들기의 당위성’을 부여해 독자에게 내적 친밀감을 안겨준다. 그 실타래를 풀어내는 과정이 얼마나 설득력 있느냐가 관건이겠지만, 기왕이면 다스베이더 같은 매력적인 적이 등장해준다면 금상첨화겠다.
허나 그런 서운함은 빙산의 일각에 그친다. 이 외제(外製) 만화는 바다 속에 감춰진 보물덩어리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훨씬 거대하고 푸짐하다. 특히 ‘웹소설 공장에서 찍어낸 회귀물 천하’가 돼버린 국내 웹툰 시장(물론 수작들도 있다)에서, 이리도 작품성과 개성이 물씬한 만화를 만나는 건 너무나 반갑다.
이미 ‘에브리띵…’ 팬들은 알겠지만, 최근 만화에서 이토록 ‘그림자’를 절묘하게 써먹는 작품은 본 적이 없다. 단지 궁금해진다. 그 그림자는 빛이 만들어낸 걸까, 아님 어둠이 존재했기에 빛도 태어난 걸까. 유토피아는 어쩌면 디스토피아의 또 다른 얼굴일지도 모른다. 영원히 웃고 있는 곰돌이처럼.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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