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똥 때문에 발견한 ‘가라앉지 않는 항공모함’···2차 세계대전의 방향을 바꿨다 [김기철의 역사를 바꾼 사물들]
“미드웨이 섬의 담수 시설이 고장났음. 빠른 조치 바람.”
1942년 하와이 주둔 미국 해군 정보부 암호해독반 지휘관 조지프 로슈포르 중령은 해군 본부에 이 같은 전문을 전송했다..
일본 해군 정보부는 이 전문을 감청하고 해군 본부에 곧바로 타전했다.
“AF에 물 부족.”
보고를 받은 해군대장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이제 작전을 감행할 때가 왔군.”
그런데 일본군에게 감청당했다는 보고를 받은 체스터 니미츠 제독의 얼굴에도 미소가 스쳤다. “예식장(미드웨이)에 올 하객(일본군)의 규모도 알아 오도록.”
야마모토는 즉각 미드웨이에 대한 공격을 명령했다. 진주만 공습계획을 수립하고 이를 성공시켰던 장본인인 야마모토 대장은 미드웨이가 제2의 진주만이 될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일본 해군은 미군이 던져놓은 미끼를 물었던 것이다. 일본군 통신문에 들어있던 ‘AF’라는 암호가 ‘미드웨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던 미군은 “예식장에 올 하객 수”까지 파악하고 일본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미드웨이 해전은 태평양전쟁의 균형추를 바꿔 결과적으로 역사의 경로를 바꾼 기념비적인 전투다. 그렇다면 여기서 궁금한 것은 미국은 어떻게 미 대륙에서 수천km 이상 떨어진, 면적이 5제곱킬로미터 조금 넘는, 사람도 살지 못하는 이 섬을 자기들의 영토로 확보하고 있었느냐는 점이다. 이 모든 것이 새똥에서 시작했다.
“한해 동안 사람과 짐승의 오줌을 모아서 정부에 제출하라.”
국민들은 가정집마다 여름에는 하루에 한 번, 겨울에는 이틀에 한 번씩 오줌을 모은 통을 문 앞에 내놓아야 했다. 그러면 이를 나라에서 수거해 갔다.
하지만 이 포고령을 따르지 않는 농민들이 많았다. 오줌은 농민들에게는 밭에 뿌릴 소중한 비료였기 때문이다. 분뇨 수거율을 높이기 위해 영국 국왕은 분료 수거원들에게 어떤 집이건 들어가서 분뇨를 찾아서 수거해올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하기도 했다. 이렇다보니 농민들과 수거원들 사이에서 똥오줌을 숨기고 찾는 숨바꼭질이 벌어졌다.
그렇다면 왜 이런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진 것일까? 똥오줌에 들어 있는 질산칼륨 때문이었다.
농민들은 경험을 통해 똥오줌이 농작물의 성장을 돕는 비료라는 사실을 수천년 전부터 알아왔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질산칼륨은 화약의 원료이기도 했다. 고려말 최무선이 화약을 개발하는 과정을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중국의 화약에는 숯과 황, 초석이 들어가는데 명나라는 초석 제조법을 비밀에 붙였다. 최무선은 명나라 사신 이원에게서 초석 만드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집에 실험실을 만들고 직접 제조에 나섰다. 최무선이 20여년의 연구 끝에 얻어낸 방법은 나뭇재에 사람의 변을 섞어서 오래 보관한 뒤 여기서 추출하는 방법이었다. 변에 있는 요소와 암모니아로부터 생긴 질산과 나뭇재 속의 칼륨이 결합하여 초석(질산칼륨)이 되는 원리였다.
중국에서 화약 제조법을 배워가서 이를 발전시킨 서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영국은 17세기에 대포와 총포용 장약을 생산했는데 장약은 탄소 10%, 유황 15%, 초석 75%로 구성돼 있다. 17세기는 유럽의 절대왕정들이 식민지 쟁탈전을 벌이던 시기여서 초석 수요가 많았다. 그렇다 보니 영국은 포고령까지 발표하고 오줌 수거꾼인 초석장이까지 고용해서 초석 확보에 혈안이 됐던 것이다. 말하자면 당시 오줌은 국가의 전략 물자였던 셈이다.
영국이 18세기 중엽 인도의 여러 지역 중에서 벵골 지역을 가장 먼저 정복해서 합병한 배경에는 이 지역에 묻혀 있던 초석의 가치도 크게 작용했다.
1700~1740년대 사이 영국은 벵골지역에서 연간 1000~2000톤의 초석을 수입했다. 1757년 플라시 전투의 승리로 영국 동인도회사는 벵골지역을 손아귀에 넣게 된다. 이로써 영국은 전세계 초석 생산량의 70%를 확보했다. 영국이 제국주의 식민지 쟁탈전에서 앞설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다.
19세기초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토양 영양제는 도살장에서 뼈를 갈아만든 가축의 골분이었다. 영국, 프랑스, 독일에서는 뼈를 제분소로 보내 가루로 만든 뒤 이를 밭에 뿌렸다. 하지만 골분의 공급은 제한적일 수 밖에 없었다. 골분 가격이 폭등하자 중간상인들이 해서는 안될 일까지 저지르고 말았다. 워털루나 아우스테클리츠 같이 전쟁이 벌어졌던 지역에서 사람의 뼈를 수거해서 이걸 골분으로 만들어 판 것이다. <런던 옵저버>지는 1822년 이렇게 보도했다.
“공공연하게 대규모로 자행되던 행위가 이제는 의심의 여지없는 기정사실로 받아들어졌다. 죽은 병사들이 상업 거래의 가장 중요한 품목으로 전락했다는 것 말이다. 무덤 도굴꾼들이 전쟁터에서만 한정적으로 도굴을 할 것이라고는 보이지 않다. 언급하기 매우 조심스럽지만, 크게 본다면 요크셔의 성실한 농부들이 매일 먹는 일용할 양식을 자기 아이들의 뼈에 빚지고 있다.”
사람의 뼈가 섞였을지 모를 골분을 농민들이 경작지에 뿌리는 비극을 끝낸 물건이 있다. 바로 ‘구아노(guano)’다. 구아노는 새똥들이 쌓여 바위처럼 굳은 물질을 말한다.
로맹 가리의 소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는 인생의 허무를 그리고 있지만, 페루로 날아온 새들이 싼 똥은 페루에게 축복이 됐다. 새똥이 쌓인 섬들은 아무것도 자라지않는 불모의 땅이 됐지만 그 새똥이 농작물을 키우는 훌륭한 비료가 되는 역설은 또 로맹 가리의 소설을 닮기도 했다.
독일의 지리학자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알렉산더 폰 훔볼트(1769~1859)눈 1802년 페루 연안 지역을 탐사 중이었다. 페루 연안에서 21km, 리마에서 남쪽방향으로 805km 정도 떨어진 친차 제도로 알려진 섬들 주변으로 다가가고 있었는데 섬에서 나오는 악취로 접근조차 힘들었다. 무덤 봉분 모양의 섬들에는 풀 한 포기 자라지 않았지만 섬들 주위로는 수 많은 새들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갈매기, 가마우지, 펠리칸 같은 새들이었다.
페루가 새들의 군락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페루 연안에서 북상하는 해류의 영향이 컸다. 이 해류가 바닷속을 한번 뒤짚어 놓기 때문에 심해에 있던 플랑크톤이 올라와 해수면에는 플랑크톤이 넘쳐나게 된다. 플랑크톤이 넘쳐나니 엔초비타라고 하는 멸치떼가 나타나고 또 이들을 노리는 새떼들이 모여든 것이다. 플랑크톤과 물고기떼와 새떼들을 불러모으는 이 해류에는 ‘훔볼트해류’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페루 연안에서 물고기 잔치를 벌인 새떼들은 그 주변 섬들을 화장실로 이용했다. 수만년 동안 새들의 똥이 쌓이면서 구차 제도에는 구아노층이 형성됐다. 퇴적층의 두께만 무려 45미터였다.
이 구아노가 최고의 비료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훔볼트는 구아노 샘플을 채취해 유럽으로 가져와 프랑스 화학자들에게 성분 분석을 의뢰했다. 분석결과, 질소 함유량이 17%에이른다는 사실이 확인됐고, 유럽의 과학자들은 구아노의 잠재력을 설파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는 선구적인 화학자 유스투스 폰 리비히가 있었다.
리비히는 <농업과 생리학에서의 응용유기화학>(1840)에서 “모래와 점토로만 이뤄진 토양조차 구아노 소량만 있으면 풍성한 수확을 기대할 수 있다”고 구아노의 효능을 선전했다.
유럽에 구아노 열풍이 불었다. 1841년 영국은 친차 제도에서 1880톤의 구아노를 들여왔는데 4년 후인 1845년에는 수입량이 21만9704톤으로 증가했다.
구아노를 사실상 독점하고 있던 페루는 40년간 1300만톤의 구아노를 수출해 대략 1억5000만파운드를 벌여들였다. 오늘날 화폐가치로 치면 대략 130억달러에 해당하는 액수였다. 구아노덕분에 페루는 엄청난 경제호황을 누렸지만 안타깝게도 친차 제도의 구아노는 1876년쯤 모두 고갈되고 말았다.
바다는 없지만 볼리비아는 매년 3월 23일에는 바다의 날 기념식도 거행한다. 볼리비아 최대 도시 라파스에서는 흰 제복 차림의 해군이 거리를 행진하고, 배 모형과 깃발을 든 아이들이 그 뒤를 따른다. 과거 볼리비아가 가졌던 바다를 기억하고 다시 찾아오자는 다짐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볼리비아는 왜 바다를 잃어버린 것일까? 이것 역시 새똥 때문이다.
친차제도의 구아노가 고갈돼 가고 있을 때 남미의 아타카마 사막에서 초석과 함께 대량의 구아노 집적지가 발견됐다. 지금 아타카마 사막은 칠례 영토 안에 있지만 당시만 해도 칠레와 페루, 볼리비아가 아타카마 사막을 국경으로 삼고 있었다. 당연히 세 나라 모두 구아노에 욕심을 냈다.
우선은 칠레와 볼리비아가 협상을 통한 해결책을 찾았다. 1866년 칠레와 볼리비아는 경계선 조약을 맺는다. 칠레와 볼리비아의 국경을 남위 24도선으로 하고 23도와 25도선 사이에서 나는 구아노와 초석 생산량의 반을 나누기로 했다. 그런데 땅을 파면 팔수록 볼리비아 영토 쪽에 대부분의 구아노가 매장돼 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1876년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볼리비아 군사정부는 결국 칠레와의 협약을 파기하고 볼리비아 영토 안에서 구아노를 채굴하는 칠레 기업들에 대한 수출 관세를 대폭 인상했다. 칠레가 이를 거부하자 볼리비아는 한걸음 더 나아가 칠레 기업이 개발한 광산을 몰수해버렸다. 결국 1879년 칠레는 볼리비아에 대해 군사적 보복에 나서고 여기에 주변국가들이 가세하면서 확전됐다. 이것이 태평양전쟁, 일명 새똥 전쟁이다.
아타카타 사막의 구아노 접근권을 봉쇄당했던 페루는 볼리비아와 동맹을 맺고 참전했지만 영국과 프랑스가 지원하던 칠레의 상대가 되지는 못했다.
볼리비아는 여전히 바다를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 2006년 취임한 에보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은 ‘해양 진출권 확보’를 최우선 외교 정책으로 제시했다. 그는 볼리비아 영토 주권을 되찾겠다며 “1904년 평화조약을 폐기하거나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칠레 역시 물러서지 않았다. 2011년 세바스티안 피녜라 칠레 대통령은 해당 조약의 합법성을 재천명했다.
모랄레스 대통령은 2014년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이 사안을 회부했지만 ICJ는 평화조약의 효력을 인정하고 칠레에 재협상 의무가 없다고 결론 내렸다.
페루와 칠레의 완충지대 역할을 하던 볼리비아 태평양 연안 영토과 칠레 땅이 되면서 남미의 앙숙 국가인 두 나라는 국경을 마주하게 됐고 필연적으로 영토 분쟁을 벌이게 됐다. 페루 남부의 타크나 지역은 태평양전쟁에서 승리한 칠레가 차지하게 됐으나 1929년 리마조약을 통해 다시 페루에 반환됐다. 하지만 여전히 콩코르디아라고 불리는 지역은 양국이 아직도 자기땅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태평양전쟁에서 승리한 칠레에는 행복한 결론이 기다리고 있었을까? 역시 아니었다. 전쟁을 통해서 구아노와 초석이 묻힌 지대를 칠레가 대부분 확보했지만 광산의 실제 소유권은 대부분 영국인들에게 돌아갔다. 칠레가 볼리비아와 페루를 상대로 전쟁을 하는 사이에 영국이 광산의 채권을 10분의 1로 떨어진 가격에 사들였기 때문이다.
황당한 법안이었지만 1856년~1903년에 미국의 사업가들은 94개의 섬과 암초, 산호섬 등을 점령하고 소유권을 주장했다. 미국 정부는 이중 66개 섬에 대한 소유권을 인정했다.
구아노 섬 법안으로 확보한 뒤 미국이 현재 미국령 군소 제도(United States Minor Outlying Islands)로 분류해 실효지배하고 있는 섬은 모두 9곳이다. 여기에는 베이커섬(Baker Island), 하울랜드섬(Howland Island), 자르비스섬(Jarvis Island), 존스턴 환초(Johnston Atoll), 킹먼 환초(Kingman Atoll), 미드웨이 환초(Midway Atoll), 나배사섬(Navassa Island), 팔미라 환초(Palmyra Atoll), 웨이크섬(Wake Island)이 포함돼 있다. 이중 나배사섬을 제외한 8곳이 모두 태평양에 위치해 있다.
미국이 구아노섬 법안을 제정할 당시에는 구아노 확보가 가장 우선하는 과제였지만 이후 이 법을 시행하는 과정에서는 구아노 확보 보다는 미국의 전략적인 목적이 더 크게 작용한 측면이 있다.
특히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한 사람이 링컨 대통령 당시 국무장관이었던 윌리엄 H. 시워드였다. 시워드 국무장관은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획득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1867년 시워드는 주미 러시아 공사 예두아르트 스테클 남작과 협상을 통해 알래스카를 720만달러에 매입했다. 당시 미국 정가에서는 ‘알래스카’를 ‘시워드의 아이스박스’라고 부르며 놀림감으로 삼았지만 새 영토는 훗날 금, 원류, 가스가 발견되면서 미국의 복덩어리가 됐다.
하지만 당시 시워드가 알래스카를 매입한 것은 이런 가능성을 내다본 결정이 아니라 태평양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확보할 수 있는 기지로 삼기 위해서였다.
구아노섬 법안에 근거해서 1867년 8월 28일 미국이 미드웨이 환초를 확보할 때도 이런 전략적인 판단이 더 중요하게 작용했다. 1867년 전투함 래커워너호의 윌리엄 레이놀즈 함장이 미드웨이 환초를 점령하며 소유권을 취득하는데 당시 미 해군은 미드웨이 환초를 하와이에서 아시아쪽으로 향하는 징검다리 항구로 삼으려고 했다. 물론 실망스럽게도 미드웨이가 심해 항구로는 부적합한 것으로 드러났지만, 미드웨이 환초는 훗날 공군력의 중요한 요소가 되면서 앞서 얘기한 것처럼 2차 세계대전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미국이 19세기말 태평양 지역에서 섬 확보에 나선 배경에는 독일의 적극적은 영토 확장 움직임도 작용했다.
1884년 독일령 뉴기니를 점유하면서 태평양에서 영토 획들을 시작한 독일 해군은 오늘날 마셜, 솔로몬, 마리아나 제도까지 포함하여 남태평양 섬들을 빠르게 식민화했다.
태평양에서 징검다리를 확보하고자 했던 미국과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미국과 독일은 사모아섬에서 충돌했다.
1872년 전함 내러갠싯호(Narragansett)의 리처드 미드(Richard W. Meade) 사령관은 ‘미국의 위대한 정부의 우정과 보호’를 대가로 동사모아인들로부터 파고파고(Pago Pago) 항구의 땅을 임대해 사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1885년 독일 해군은 서사모아는 물론 동사모아까지 빼앗겠다는 의지를 발표했고 이는 곧바로 미국 영사로 하여금 사모아가 미국의 보호 아래 독립을 유지해야 한다는 반대 입장을 발표하도록 만들었다.
미국의 강경한 입장에 놀란 독일의 비스마르크는 협상가들에게 물러나라고 지시한 뒤 1890년 베를린 협상에서 독립된 사모아를 독일 미국 영국 삼국이 감독하기로 합의한다. 이후 서사모아는 독일령이 됐다가 1차 세계대전 이후 뉴질랜드의 보호령이 됐다. 하지만 동사모아는 ‘아메리칸 사모아’로 남게 됐다.
알래스카부터 미드웨이, 하와이, 사모아로 이어지는 태평양의 미국 징검다리들을 지켰고 이 징검다리는 일본과의 태평양전쟁에서 그 위력을 발휘했다.
미드웨이 환초의 교훈으로 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미국은 섬들에 군사 기지를 유지하며 이를 ‘가라앉지 않는 항공모함’으로 활용하고 있다.
미국의 해군 제독이자 전략가 앨프리드 세이어 머핸(영어: Alfred Thayer Mahan,1840~1914년)은 <해양력이 역사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책에서 “미국의 안보는 해군력과 섬 기지의 결합을 통해 태평양을 지배하는데 달려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런 생각은 여전히 미국의 세계 전략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인류는 명확한 원리는 이해못했지만 경험을 통해서 질소가 고정되는 몇가지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우선 번개가 치면 순간적인 높은 에너지 때문에 질소 분자의 3중 결합이 깨지면서 질소 산화물이 만들어질 수도 있다.
일본어로 번개를 이나즈마(稻妻•いなずま)라고 부른다. ‘벼 도(稻)’에 ‘아내 처(妻)’를 붙여 ‘벼의 아내’라는 뜻이다. 일본의 농민들은 경험을 통해 번개가 치면 벼가 잘 자란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과학적으로는 번개가 치면 공기 중의 질소가 비에 녹아들어 그 비가 땅을 비옥하게 하고 그 덕분에 벼가 여문다.
질소가 고정되는 또 하나의 방법은 콩과 식물 등의 뿌리에 의한 것이다. 뿌리에 존재하는 뿌리혹박테리아가 질소 분자를 고정시킨다. 과거 농부들은 밀이나 벼 같은 작물을 콩과 식물과 번갈아 가면서 심었는데 역시 과학적으로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콩과 식물이 땅의 지력을 높힌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서 알았기 때문이다.
많은 과학자들이 질소를 고정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려는 경쟁에 뛰어들었다. 그 중 한명이 독일의 화학자 프리츠 하버였다. 당시 독일의 화학자들은 수소(H2)와 질소(N2)를 결합해 암모니아(NH3)를 얻는 방법을 연구했다. 암모니아를 얻으면 합성비료의 원료로 즉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화학반응식으로는 간단하지만 발열반응이라는 현상 때문에 실제로 암모니아를 얻기는 쉽지 않았다.
하버는 이 문제를 오스뮴을 촉매로 사용해서 해결하고자 했다. 당시 하버는 세계적인 화학기업인 바스프(BASF)의 연구비 지원으로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 하버가 세운 이론상으로는 높은 압력과 오스뮴을 촉매로 사용하면 암모니아 생산 수급율을 높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를 경제성 있는 대량 생산 체제로 전환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다행히 바스프에는 카를 보슈라는 천재적인 공학자가 있었다. 보슈는 하버의 이론을 생산 시스템으로 전환시키는 역할을 맡았다. 그는 1913년 높은 압력을 유지하며 생산 효율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암모니아 공장설비를 완성했다. 이 공정이 바로 ‘하버-보슈 공정’이다.
하버-보슈 공정으로 합성비료를 대량생산할 수 있는 길이 열리면서 ‘새똥 전쟁’까지 유발시켰던 구아노가 말 그대로 똥값이 됐다. 합성비료로 인해 식량생산이 늘어나고 인류가 겪는 기아가 줄어들게 한 공로로 하버와 보슈는 각각 1918년과 1931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했다.
하버의 노벨상 수상을 두고서는 일부에서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하버가 1차 세계대전 때 했던 일 때문이다. 유대인이지만 독일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애국심이 훨씬 강했던 하버는 독일이 벌인 전쟁에 도움을 주기 위해 독가스 무기를 개발했기 때문이다. 독가스 개발에 하버는 군인들보다 더 적극적이었다고 전해진다. 염소를 이용해서 하버가 개발한 독가스는 1915년 4월 22일 벨기에의 이프르 전선에서 프랑스 군대를 상대로 실전에 사용됐다. 이 독가스로 프랑스 병사 5000명이 질식사했다.
하버의 이 같은 행동을 가장 반대한 사람은 그의 아내 클라라 임머바르였다. 독일 최초의 여성 화학박사이기도 했던 임머바르는 화학 무기의 위험성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이다. 임머바르는 하버의 독가스 사용으로 승리한 이프르 전선 축하연이 열렸던 1915년 5월 자신의 집에서 하버의 권총으로 자살했다. 아내의 자살에도 불구하고 하버는 이튿날 러시아 전선으로 떠났다고 전해진다.
‘똥’이 농작물을 키우는 비료가 될 수도 있고, 또 사람을 죽이는 화약이 될 수도 있는 것처럼 과학이 인류를 구원하는 길을 열 수도 있고, 또 파멸로 이르는 문을 열 수도 있다는 사실을 하버는 자신의 인생을 통해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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