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신보다 수준 낮은 정치 보도? 정치 기사가 비슷한 이유[윤다빈의 세계 속 K정치]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해 5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의 공동 기자회견에서 미국 워싱턴포스트 기자에게 “내각에 여성 장관이 거의 없다”는 돌발 질문을 받았습니다. 해당 기자는 윤 대통령이 대선후보 때 공약으로 내걸었던 여성가족부 폐지 문제를 거론하면서 “한국과 같은 경제 강국에서 여성의 대표성을 높이려면 행정부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하냐”고 물었습니다.
국내 언론에서는 보통 대통령 기자회견이 있으면 최근 주목도가 높은 현안에 관해 묻습니다. 기자 개인의 문제의식이 담긴 질문은 비교적 삼가는 편이죠. 반면 워싱턴포스트 기자는 윤석열 정부의 구조적인 문제점에 관해서 관심을 가졌습니다.
이 기자회견에 참여한 기자들은 자국 정상에게만 질문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질문은 하나씩만 해달라는 요구도 있었습니다. 한국 기자들은 그 요청을 수용했고, 실제로 윤 대통령에게만 한 가지씩 질문을 던졌습니다. 하지만 워싱턴포스트 기자는 현장에서 돌발적으로 상대국 대통령에게 물었습니다.
질문을 들은 윤 대통령의 낯빛은 어두워졌습니다. 윤 대통령은 잠시 생각하다가 “지금 공직사회에서 장관 위치까지 여성이 많이 올라오지 못했다”며 “여성에게 기회가 완전히 보장되지 않았다. 기회를 더 적극적으로 보장하겠다”고 했습니다. 대통령 당선 직후 여성할당제를 적용하지 않겠다고 했던 것과 사뭇 달라진 답변을 끌어낸 것입니다.
● 기자회견에서 작아지는 기자들, 왜?
대중이 관심을 갖는 기자회견이 열릴 때마다 기자들의 질문이 날카롭지 않다는 지적이 뒤따라옵니다. 외신과 한국언론 기자를 비교하면서 해외에서는 촌철살인 질문이 많은데 한국 기자는 왜 질문을 제대로 하지 않냐는 비판도 빠지지 않습니다.
이러한 현상이 발생하는 이유는 한국의 출입처 문화 영향이 큽니다. 한번 출입처에 소속된 기자는 몇 년에 걸쳐 같은 취재원을 꾸준히 만나야 합니다. 그런 만큼 중요한 취재원과 공개된 장소에서 날 선 공방을 벌이는 것은 한국 정서상 부담되는 일입니다. 당사자와 관계가 끊어지거나 심하면 소속 언론사가 취재를 거부당하는 일도 생깁니다.
또 시민들의 정치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특정 정치인에게 날 선 질문을 할 경우 극렬 지지자들에게 온라인 공격을 당할 각오를 해야 합니다. 정도가 심할 경우 본인과 가족 신상이 공개되는 ‘사이버 테러’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단독 경쟁이 심한 언론 환경상 ‘따로 질문해 단독 기사를 쓰는 게 낫다’는 인식도 있습니다. 다른 기자들이 많은 곳에서 질문하면 그 답변이 모두에게 공개되고 비슷한 기사가 쏟아지게 됩니다. 자신이 따로 취재 중인 내용을 타사 기자 앞에서 노출하는 대신 전화하거나 찾아가 물어보는 게 더 이익이 되는 셈이죠.
물론 기자들의 잘못된 취재 관행도 한몫합니다. 실제로 필자가 국회를 처음 출입하면서 놀란 점은 국민의힘, 더불어민주당을 출입하는 기자 중 꽤 많은 이들이 사석에서 자신이 취재하고 있는 정당을 ‘우리 당’이라고 부른다는 점이었습니다.
필자 역시 어느 정도 국회 출입에 적응이 된 후부터는 당 관계자를 만날 때 종종 ‘우리 당’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XX당 총선 전망은 어떻게 보세요?’ 보다 ‘우리 당 총선 전망은 어때요?’라고 묻는 게 취재원과 더 긴밀한 대화를 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는 왜곡된 직업윤리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기자가 객관적 관찰자로서 공론장을 만드는 역할을 포기한 셈이기 때문입니다. 정치권과 운명공동체가 된다면 그가 쓰는 기사는 편향과 왜곡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미국 기자들의 취재 방식에 관해 정리한 책 ‘탁월한 스토리텔러’에 따르면 한국 언론계는 취재원과 끈끈한 관계를 맺는 게 기자의 능력으로 인정됩니다. 반면 미국에서는 언제든지 취재원에게 까다로운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자세가 기자의 덕목으로 평가됩니다.
● 따옴표 뒤에 숨는 정치 기사
국내 정치 기사에는 정치인들 간 피상적인 싸움만 있고 심층 보도는 없다는 지적도 많습니다.
흔히 ‘정치는 말로 시작해 말로 끝난다’는 표현이 있을 정도로 정치인의 말은 그의 철학과 품격을 보여주는 중요한 도구입니다. 유력 정치인의 말 한마디에 공직사회 분위기가 좌우되고, 사회적 갈등 양상이 달라지며, 정당의 지향점이 생기기도 하죠.
그러다 보니 기자들은 말을 중시합니다. 인공지능이 자동으로 음성을 글자로 변환하는 시대임에도 발언의 토씨나 분위기를 정확히 살리기 위해 여전히 기자들은 바닥에 앉아 기자회견과 백브리핑을 받아치고 있습니다. 정치인의 페이스북 메시지, 라디오 인터뷰 발언도 좋은 기사 소재가 됩니다.
기자는 말을 이용해 정치인 간 싸움을 붙입니다. A당에서 B당 얘기를 묻고, 또다시 B당에 가서 ‘A당이 당신에 대해 이렇게 말했는데 어떻게 생각하냐’는 식입니다. 정치 기사의 상당수가 정당 간, 계파 간 정치인 싸움을 붙이는 방식으로 생산됩니다. 대체로 이런 기사들이 온라인에서 클릭 수가 높은 편입니다.
한국언론이 유독 말에 의존한다는 점은 연구에서도 확인이 됩니다. ‘한국 일간지와 해외 유력지 비교연구’에 따르면 2017년 한국 10대 일간지에서 기사 제목에 따옴표를 사용한 비율은 59.1%였습니다. 반면 일본 아사히신문은 13.9%, 미국 뉴욕타임스는 2.8%, 영국 타임스는 0%였죠.
또 국내 주요 일간지에서는 정보 제공이 목적인 스트레이트 기사 비중이 84%에 달했습니다. 스트레이트 기사 상당수는 정치인의 말을 인용한 것입니다. 분석·해설 기사는 10.1%에 그쳤죠. 반면 뉴욕타임스의 경우 스트레이트 기사는 20.8%지만 분석·해설 기사는 그 3배인 59.7%에 달했죠.
박재영 고려대 미디어학부 교수는 “한국과 미국 언론 보도에서 가장 큰 차이는 사안의 복합성을 어느 정도 전제하는가에 있다”며 “한국 기자들은 단순 찬반을 언급하거나 사안의 일면만을 부각하고 쓴다면 미국 기자들은 그 사안이 지닌 복합적인 측면을 굉장히 많이 고려하고 사안을 다룬다”고 지적했습니다.
정치인의 말은 정치 기사를 구성하는 중요한 소재지만 여기에만 의존하면 본질은 사라진 채 정쟁만 남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 확인이 안 된 주장이 따옴표 속에 숨어서 검증 없이 전달되는 문제도 있습니다. 유력 정치인의 말을 단순 전달하는 것을 넘어 기자 스스로가 좋은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아가는 노력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 기계적 중립…똑같은 기사가 나오는 이유
정치 기사를 쓸 때 목에 가시처럼 신경이 쓰이는 것이 바로 ‘기계적 중립’입니다. 실제로 기자들이 쓰는 기사가 엄정한 중립을 지키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의 형평성을 갖춘다는 점에서 기계적 중립을 강조합니다.
특히 선거 때가 되면 기계적 중립에 대한 압박이 커집니다. 신문과 방송에는 주요 후보의 기사가 거의 같은 분량으로 실리게 됩니다. 오늘 신문에 A 후보의 인터뷰가 원고지 8매 분량으로 실렸다면 다음 달 신문에 B 후보의 인터뷰도 8매 분량으로 실리는 식입니다. 방송 뉴스에서도 경쟁 후보자들 간 화면 노출 시간을 ‘초 단위’까지 맞추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계적 중립은 정치 기사를 쓰는 데 분명 필요합니다. 일단 기자가 갖는 고정관념이나 편견, 이해관계로 인한 기사 왜곡을 막는 역할을 합니다. 기자 개개인이 불완전한 존재인 만큼 기계적 중립을 지킴으로써 자신이 갖는 왜곡된 이미지로 인해 기사가 편파적으로 흐르는 걸 최소화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계적 중립을 강조하다 보면 정치 기사는 독창성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후보마다 내용과 분량을 맞춰야 하니 판에 박힌 기사가 나오는 것이죠.
● 기사 속 ‘익명 취재원’ 없앨 수 없나
정치 기사에서 자주 등장하는 익명의 취재원이 기사의 질을 떨어뜨린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정치 기사에는 핵심 관계자, 정통한 관계자, 여권·야권 관계자 등 온갖 종류의 관계자들이 등장합니다. 익명으로 나간 관계자의 발언은 사실 확인이 어렵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다만 2021년 발표된 ‘정치 기사 익명 취재원 표기 관행’ 논문에 따르면 한국의 6대 일간지와 미 뉴욕타임스 기사에서 익명 취재원을 사용하는 빈도는 45.5%와 48.7%로 오히려 뉴욕타임스가 더 높았습니다. 미국 유력 언론에서도 취재원 보호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실명을 밝히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국내 언론에서 익명 취재원을 쓴 이유에 관해 설명한 기사가 1.25%에 그친 반면 뉴욕타임스는 7.87%가 이유를 설명했다는 것입니다. 부득이하게 익명 취재원을 활용하더라도 그 이유를 기사에 밝히면서 주장의 신뢰도를 높이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정치 기사를 쓰면서 실명 보도를 할 수 있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예민한 주제일수록 취재원이 이름 공개를 원치 않습니다. 실명 보도를 전제로 질문할 경우 자신의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죠.
미국의 ‘우수 저널리즘을 위한 프로젝트’는 부득이 취재원을 밝히지 못하는 경우, 기자는 왜 취재원을 밝힐 수 없는지, 익명으로 등장하는 취재원은 기사의 내용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기사 속에서 설명해줘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래야 기사의 신뢰도가 올라가고 독자가 오도될 가능성이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이런 노력이 기사의 신뢰도 확보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한국 정치의 수준은 왜 나아지지 않는가?’라는 주제로 글을 쓰고 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 많은 분이 성심성의껏 의견을 보내주셨습니다. 김*우님께서는 모든 사안을 단순 정쟁으로만 취급하고, 사안의 본질을 지적하지 않는 한국언론의 보도 행태를 지적해주셨습니다. 김*수님께서도 ‘왜 기자들은 대통령에게 질문을 받으라고 요구하지 않느냐’는 의견을 주셨습니다. 언론사에서 일하는 입장에서 뼈아픈 지적이자 이 글을 쓰게 된 이유입니다. 다만 이런 주제의 글을 쓰는 게 쉽지 않은 까닭은 저 또한 취재원과의 관계 탓에 질문을 주저했던 숱한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워딩으로 공장 돌리듯 기사를 생산하고, 술자리에서 ‘우리 당’ 표현을 아무렇지도 않게 쓰던 사람이 갑자기 남 일 대하듯 논평하는 게 옳지 않다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한국 정치에 대한 비판적 글을 쓰는 입장에서 정치 수준을 좌우하는 정치 보도의 품질은 한 번쯤 짚고 넘어가야 할 주제라고 생각했습니다. 독자 여러분과 계속 한국 정치의 발전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싶습니다. empty@donga.com으로 소중한 의견 부탁드리겠습니다. |
윤다빈 기자 empt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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