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장소에 도사린 테러 그림자…한국에 ‘안전한 공간’이 없다

강은선 2023. 8. 5.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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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 마치고 나오는 교사에 범행
대전서 20대男 용의자 긴급체포
경찰서 “피해자와 사제지간” 진술
분당 서현역 시민·상인 두려움 호소
“외출할 일 있어도 안전부터 걱정”
서울 고속터미널 흉기소지男 체포
유사범죄 예고글 27건… 5명 검거
국회 테러 협박 글에 경찰 수사
“신림역 범죄 조선은 사이코패스”

흉기 난동에 ‘가장 안전해야 할 공간’이어야 할 학교가 뚫렸다. 4일 대전 대덕구 소재 고등학교에서 칼부림 사건이 발생해 교사가 크게 다쳤다. 도주했던 용의자(27)는 사건 발생 2시간여 만에 경찰에 붙잡혔다. 대덕경찰서에 따르면 이날 오전 10시4분 인근 한 고교에서 교사(49)가 흉기에 피습당했다. 교사는 얼굴과 복부, 가슴 등을 7차례 정도 찔렸다. 대학병원에서 긴급 수술을 받았지만 생명이 위독한 상태다.

경찰에 따르면 용의자는 이날 오전 9시24분쯤 학교 안으로 들어와 교무실을 방문해 해당 교사를 찾았다. 수업 중이라는 말을 듣고 교무실 밖 복도에서 30분 정도를 기다렸다. 수업을 마친 교사가 2층 교무실로 이동하자 따라와 교사를 찌르고 도주했다.
4일 오전 10시 3분께 대전 대덕구 한 고등학교에서 20대 후반 남성이 40대 교사를 흉기로 찌르고 도주했다. 뉴시스
대전시교육청에 따르면 학교를 방문하려는 외부인은 교문 입구에서 학교 지킴이가 이름과 연락처를 받지만 용의자는 방문자 등록도 하지 않은 채 학교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택시를 타고 도주했던 용의자는 범행 발생 2시간17분 만인 낮 12시20분쯤 사건 현장에서 7㎞ 정도 떨어진 중구 유천동의 한 아파트 인근 도로에서 경찰에 긴급체포됐다.

용의자는 경찰 진술에서 피해 교사와 사제지간이라고 말했으나 범행을 벌인 고교 출신은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 경찰은 살인미수 혐의를 적용하기로 했다.

배인호 대덕서 형사과장은 “용의자의 약물 복용이나 건강 문제 등은 조사할 부분”이라고 말했다.
두려운 학생들 4일 대전 대덕구 한 고등학교에서 교사가 흉기 습격을 당하자 해당 학교 교실에 학생들이 2차 피해를 우려해 대기하고 있다. 대전=연합뉴스
교육계에선 학교 구성원에 대한 안전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전교조 대전지부는 성명서를 내고 “가장 안전해야 할 학교에서 외부인 침입으로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 현실에 근본 대책이 필요하다”고 촉구했다.

◆사람 많은 곳 노려 흉기 난동 … “안전지대 사라졌다” 공포

잇따른 흉기 난동 사건으로 시민 불안은 극에 달했다. 14명의 피해자를 낸 ‘묻지마 흉기·차량 테러’가 발생한 경기 성남시 분당구 서현역 인근은 특히 공포감에 휩싸였다. 방패를 든 경찰이 곳곳에 배치됐고, 사건이 일어났던 장소인 백화점 AK플라자는 사설 경비 요원이 순찰에 나서는 등 경비를 강화했다.

4일 오후 이곳을 지나는 시민들은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사건의 충격이 아직 생생한데, 오리역과 서현역에서 비슷한 범행을 저지르겠다는 인터넷 글도 이어지면서다. 주부 정미수(52)씨는 “신림역 사건 때만 해도 불안감이 크지 않았는데, 대형 아파트 단지 인근의 유동 인구가 많은 백화점에서 칼부림이 일어났다니 안전지대가 없는 느낌”이라며 “사건 보도를 보고 자극받은 사람들이 유사한 범죄를 시도할까 봐 걱정”이라고 말했다.
4일 시민들이 경기 성남시 분당구 서현역에서 내려 걸음을 옮기고 있다. 경찰 등에 따르면 흉기 난동 범행을 저지른 A(23)씨는 3일 오후 5시50분께 서현역 앞 인도로 차량 돌진 후 서현역 AK플라자를 누비며 흉기를 휘둘렀다. A씨의 차량 충격으로 5명이, 흉기 테러로 9명이 다친 것으로 집계됐다. 이제원 선임기자
회사원 김모(37)씨는 “아이가 방학이라 체험활동이나 쇼핑으로 함께 외출할 일이 많은데 안전한지 걱정부터 든다”며 “많은 사람이 모이는 곳은 잘 못 갈 것 같다”고 우려했다.

인근 상인들도 두려움을 호소했다. 베이커리 점주 박모(47)씨는 “오늘 오전 아르바이트생이 평소보다 지각을 했는데 혹시나 싶어 마음이 철렁 내려앉더라”라며 “장사하며 스친 손님들 중에도 다친 사람이 있겠다는 생각에 소름이 끼친다”고 말했다.

배달기사 김성배(34)씨는 “피의자가 하필이면 배달을 하던 사람이라고 들었다”며 “음식을 픽업하러 식당에 들어가면 직원들이 깜짝깜짝 놀라는 게 느껴진다”고 전했다. 오리역 인근 화장품 매장 아르바이트생 최현지(26)씨는 “오늘 출근길에 부모님이 ‘호신용품이라도 가지고 다녀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하더라”라며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왔다는 살인 예고 글을 보니 주말엔 ‘집콕’해야겠다는 생각뿐”이라고 말했다.
이날 오전 서울 서초구 고속터미널역에서도 흉기를 소지한 남성이 붙잡히면서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대처법이 공유되기도 했다. 이모(28)씨는 “흉기를 든 사람이 나타나면 어떻게 대처할지 혼자 시뮬레이션을 10번 넘게 해 봤다”며 “퇴근길에 듣는 노래가 삶의 낙이었는데 한동안은 주변 소리를 잘 들으려 이어폰도 안 끼고 다니려 한다”고 말했다.

서초경찰서는 고속버스터미널 경부선 건물 1층 상가에서 흉기를 들고 배회하던 20대 남성 A씨를 특수협박 혐의로 체포해 조사 중이다. 경찰은 이날 오전 10시39분쯤 “고속터미널에 칼을 들고 다니는 남자가 있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해 A씨의 신병을 확보했다. 인명 피해는 없었다. 경찰은 A씨가 흉기를 들고 근처 보안 요원을 협박했다고 보고 있다. 체포 과정에서 경찰은 A씨에게서 식칼 2개를 압수했다.

인파가 몰리는 백화점과 쇼핑몰을 운영하는 유통업계도 비상이 걸렸다. 협박글이 올라온 서울 잠실에서 롯데타워와 롯데월드몰을 운영 중인 롯데물산은 이날 오전 6시부터 기존 순찰 규모(70∼80명)의 2배 가까운 130명을 확대 배치했다고 밝혔다. 서울 용산역과 연결된 HDC아이파크몰은 그간 정장을 착용하고 근무하던 보안 직원에게 보안 조끼를 지급했다.
4일 고속버스터미널 경부선 건물 1층 상가서 경찰이 20대 남성 A씨를 체포하는 모습. 뉴스1
흉기를 사용해 유사한 범행을 저지르겠다는 온라인 예고 글이 전국에서 잇따르면서 경찰은 작성자 추적 및 비상근무 체제에 돌입했다. 윤희근 경찰청장은 경찰 사상 첫 특별치안활동을 선포했다. 특별치안활동이란 통상적인 일상치안활동으로는 치안 유지가 어렵다고 판단될 때 경찰청장 재량으로 경찰 인력과 장비를 집중 투입하도록 하는 조치다. 경찰은 살인 예고지역과 다중이용시설 등 전국 15개 지역 경찰청 36개소에 소총과 권총으로 무장한 경찰특공대원 127명을 전진 배치했다. 5일부터는 전술 장갑차 10대를 추가 배치한다는 계획이다.
경찰에 따르면 이날 오후 6시 기준 지난달 21일 신림역 흉기 난동 사건 이후 경찰이 확인한 살인 예고 글은 최소 27건이며 더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 작성자 가운데 5명을 검거해 이 중 1명을 구속송치, 나머지는 추적 중이다. 경기 성남시 모란역, 서울 성동구 왕십리역에서 각각 살인하겠다고 예고한 20대 남성 2명이 이날 덜미를 잡혔다. 경찰은 분당 오리역, 부산 서면역, 잠실역, 한티역, 강남역 일대, 용산 등 언급된 장소 인근에 인력을 집중 배치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다.
서현역 일대에서 묻지마 흉기 난동 사건이 발생한 지난 3일 경기 성남시 분당 서현역 AK백화점에서 경찰이 사건 현장을 통제하고 있다. 뉴스1
이날 오후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국회를 테러하겠다는 협박 글이 올라오기도 했다. 서울 영등포경찰서는 온라인 커뮤니티 ‘디시인사이드’에 해당 커뮤니티를 폐쇄하면 국회의원들을 살해할 것이라는 글이 게시됐다는 신고를 받고 작성자를 추적하는 한편, 국회 순찰도 강화하기로 했다.

한편 경찰은 지난달 서울 관악구 신림동 번화가에서 흉기 난동으로 4명의 사상자를 낸 조선(33)이 사이코패스로 분류됐다고 이날 밝혔다.

대전=강은선 기자, 성남=박유빈·이규희 기자, 윤준호·박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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