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스토리] 1천년 역사 '탐라 감귤', 첫 나무 남아있을까?

제주방송 신동원 2023. 8. 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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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스토리'는 제주의 여러 '1호'들을 찾아서 알려드리는 연재입니다. 단순히 '최초', '최고', '최대'라는 타이틀에만 매몰되지 않고, 그에 얽힌 역사와 맥락을 짚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그 속에 담긴 제주의 가치에 대해서도 전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제주 '온주감귤나무' 1호로 여겨지는 나무의 후계목. (사진, 신동원 기자)


제주 감귤의 역사는 짧게 잡아도 1000년에 달합니다. 기록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인데요.

유구한 세월 속에서 감귤은 제주의 대표적 산업으로 성장했고, 올해엔 고유가, 고금리, 고환율 등 3고(高) 위기로 인한 소비 부진 속에서도 2년 연속 감귤 조수입 1조 원의 신화를 달성했습니다.

현재 제주 감귤산업의 시원(始原)이 됐던 첫 감귤나무가 남아있다는 이야기가 있어서 자세히 알아봤습니다.

또 근대를 거쳐 현대에 접어들면서 감귤산업이 제주에 정착하는 과정을 파헤치면서 알게 된 흥미로운 이야기도 소개하고자 합니다.

■ 역사 속 감귤, 첫 등장은 언제?

역사상 제주감귤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시기는 약 1000년 전인 고려입니다.

《고려사》에는 문종 6년(서기 1052년)에 '탐라국에서 바치는 귤의 정량을 1백포로 개정한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일종의 공물의 양을 고친다는 것이기에 최소한 그 이전부터 감귤을 진상하는 행위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보다 500년가량 앞선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탐라'라는 말이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백제 문주왕 2년(476년)에 '탐라국이 백제에 토산물을 바치니 왕이 기뻐해 사자에게 은솔(恩率)이라는 벼슬을 내렸다'는 내용인데, 이 기록이 문헌상으로 탐라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장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록에 나온 탐라의 토산물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찾을 수 없었지만, 그 토산물 중 감귤이 포함되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조선시대에도 감귤에 관한 기록이 다수 남아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세종 9년(1427년)엔 제주도 찰방(察訪) 김위민이 감귤 진상으로 인해 발생한 폐단을 임금에 고했다는 내용이 남아 있습니다.

김위민은 관청에서 감귤 열매가 맺힐 즈음 열매의 숫자를 세어 이후 수확철이 됐을 때 그 수량을 채우지 못하면 절도죄로 다스리는 제도가 백성들의 원성을 사고 있다고 봤습니다. 이러한 폐단을 고치기 위해 관에서 직접 감귤을 심게 하고, 부득이 민간의 감귤을 진상해야 할 경우엔 그 값을 넉넉히 지불해야 할 것이라는 의견을 달아 장계를 올린 것입니다.

그렇지만 김위민의 충언은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 듯합니다.

30년 가까이 지난 세조 원년(1455년)에도 감귤에 관한 기록이 나오는데, 그 내용이 '나라에 중요한 감귤을 수급하는 일에 진력(盡力)하되, 백성에게 위해가 없도록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감귤을 진상하는데 있어 백성들의 고통이 줄었다면 새로운 왕이 즉위한 해에 이같은 왕명이 별도로 내려질 이유가 없었을 것이란 해석이 가능합니다.

《탐라순력도》 〈감귤봉진〉. 감귤을 임금에게 진상하기 위해 포장하는 장면을 담은 그림.(이미지, 제주자치도)


현재 대한민국 국보(國寶) 지정을 위해 제주자치도 차원에서 노력을 기울이는 유물 《탐라순력도》에도 감귤과 관련한 그림이 나옵니다.

조선 숙종 29년(1703년) 이형상 목사가 남긴 이 유물은 모두 41폭의 그림으로 구성됐는데, 이 가운데 〈감귤봉진〉과 〈귤림풍악〉이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감귤봉진은 감귤을 임금에게 진상하는 장면을 담은 그림이고, 제주 목관아에 있는 망경루 후원 귤나무 숲에서 풍악을 즐기는 모습을 기록한 그림입니다.


조선 영조 8년(1732년), 제주 목사로 부임하는 아버지 정필녕을 따라 제주에 온 지식인 정운경이 집필한 《탐라견문록》에도 감귤에 관한 상세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탐라견문록의 부록 격이라 할 수 있는 〈귤보〉엔 유감과 대귤, 동정귤, 당유자, 석금귤, 유자, 왜귤, 금귤 등 당시 제주에서 재배됐던 10여 가지의 품종의 감귤이 소개되고, 이를 상·중·하 품종으로 분류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당시 귤은 오직 제주에서만 생산되는 과일로 공물로 바치기에도 부족해 사대부들도 진귀하게 여겼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임금에 감귤을 진상하는 제도는 1984년 갑오개혁을 계기로 사라졌습니다.

■ 1천년 탐라국 감귤 역사, 1호 감귤나무가 남아있다?

제주 '온주감귤나무' 1호로 여겨지는 감귤나무. 현재 고사(枯死)한 상태로 서귀포시 서홍동 천주교 면형의집 내 성당 현관에 보존돼 있다.(사진, 신동원 기자)


1000년 감귤 역사에서 감귤이 농업의 한 축으로 자리잡은 것은 사실 먼 과거의 일이 아닙니다.

그 이전에도 제주에 감귤을 재배하는 과원이 있었지만, 민간의 소득원으로서 광범위하고 자발적으로 감귤 재배가 이뤄진 것은 해방 이후인 1960년대 즈음부터라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이 과정에서 핵심이 된 것이 '온주감귤'입니다.

온주(溫州)는 중국 절강성 남부에 있는 도시로 이 지역에서 난 감귤을 온주감귤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과거 이 감귤이 한반도를 통해 일본으로 넘어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후 일본에서 품종 개량이 이뤄진 온주감귤이 제주에 들어온 시기는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제병합한 1910년대 전후로 보여집니다.

이 시기 제주에서의 감귤 산업의 가능성을 본 식자층 인사들이 온주감귤을 들여오게 되는데, 대표적으로 프랑스 출신의 에밀 타케 신부가 들여온 감귤나무입니다.

타케 신부는 1911년 총 14그루의 감귤나무를 일본에 있는 동료 선교사 포리 신부로부터 받게 됩니다. 한라산에서 자생하는 왕벚나무를 보내준 답례였다고 합니다.

바로 이 나무들이 현재까지 제주의 제1호 온주감귤나무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타케 신부는 이 나무들을 서귀포시 서홍동에 있는 당시 홍로성당(현 면형의집)에 심어 주민들에게 감귤 재배를 장려했다고 합니다.

이 14그루 중 1그루가 지난 2019년 4월까지 무려 108년을 살다가 고사(枯死)했는데, 지금은 면형의집 내 성당 입구에 이 고사목이 전시돼 있습니다. 나무가 있던 자리엔 그 감귤나무에 대한 설명이 담긴 표지석이 세워졌습니다.

그렇지만 이 나무의 '후계목'은 현재까지 명맥을 이어오며 버티고 있습니다. 약 60살 정도로 알려진 이 후계목은 마지막까지 남았던 감귤나무에 접을 붙여 자라난 것으로, 고사한 나무와 유전적으로 동일한 개체라는 것이 면형의집 관계자의 설명입니다.

이보다 앞선 시기, 갑신정변의 주역이었던 박영효가 제주에 온주감귤을 들여와 과원을 조성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제주에서 귀양살이를 박영효가 구남천, 그러니까 지금의 제주시 구남동 일대에 감귤원을 조성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인데요.

1908년 3월 4일자 《해조신문》에 실린 박영효의 감귤 관련 기사


1908년 4월 18일자 《해조신문》에 실린 박영효의 감귤 관련 기사


1908년 3월 5일자 《해조신문》을 보면, '제주에서 온 소식(濟州來信)'이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박영효가 제주에 와 보니 제주 사람들이 가난해 힘들게 살고 있다는 말을 듣고 자본을 대 귤나무를 심어 흥업자성(興業自成)케 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대략 한 달 뒤인 4월 18일자 《해조신문》엔 '박영효가 학업을 일으키다(朴氏興學)'라는 제목의 기사가 또 등장합니다. 박영효가 제주에 외국의 과목(과일나무)을 심어 그 자본으로 학교를 설립하고 운영했다는 내용인데, 이를 통해 앞서 박영효가 심었다는 귤나무가 외국에서 들여온 것임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다만, 현재로선 박영효가 심었다는 감귤나무들을 확인할 길이 없는 실정입니다.

당시 한반도의 혼란스러운 시대상에서 일반 도민들이 아무리 부유한 재력을 갖췄다고 해도 쉽게 감귤나무를 들여올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타케 신부 같은 경우엔 종교적인 권한이나 배경으로 감귤 나무를 들여올 수 있었고, 대신(大臣)의 반열에 올랐던 박영효는 정치적 권한과 인맥을 활용해 타지에 있는 귤나무를 들여왔을 것이란 분석이 뒤따릅니다.


■ 지금의 감귤산업, 박정희 대통령 작품?

제주 감귤산업의 발전은 1964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제주도를 방문했을 당시 감귤재배 장려를 지시하면서 본격적으로 이뤄졌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선 제주도 감귤산업이 박정희 대통령의 '작품'이라는 주장도 심심치 않게 나옵니다.

이에 대해 한 감귤 전문가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라고 말했습니다.

정부의 정책적 결정 이전에, 감귤산업이 제주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한 제주도민들의 노력과 도전 정신을 빼놓고는 감귤 산업의 발전이 성립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가 있기 40년 전에도 비슷한 정부의 방침이 발표됩니다.

1924년 3월 31일자 《매일신보》에 나온 내용인데요. 당시 조선총독부가 제주도에서 실태조사를 벌인 결과, 제주가 일본 내지(본토)의 감귤산업 주산지와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을 정도로 감귤 재배지로서 유망하고, 이에 감귤산업을 장려하는 정책을 추진한다는 내용입니다.

1924년 3월 31일자 매일신보 제주감귤 장려 관련 기사.


그러나 이러한 방침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하게 됩니다. 이러한 원인에는 와카야마 등 일본 본토에 있는 감귤주산지의 산업이 위축될 가능성을 우려한 반발이었을 것이란 주장이 있습니다.

실제 당신 일본 본토에서 감귤 묘목을 반출하는 것은 대단히 까다롭고 지난한 일이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이 방침이 아예 실효를 거두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1930년대와 1940년대, 제주의 자연 환경과 값싼 노동력 등 산업적 메리트를 보고 뛰어든 일본인들이 서귀포시 삼매봉 일대를 비롯한 서홍동 등에서 과원을 일궜는데, 필연적으로 현지인인 제주도민들이 실무적인 역할을 맡게 됐습니다.

그런데 일제가 태평양전쟁에서 패망하면서 상황이 변하게 됩니다.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과원은 과원을 실제 운영해 본 경험이 있는 실무 책임자들에게 돌아갔다고 합니다. 과원 운영에 있어 기술적, 경영적 능력을 갖춘 적임자로 여겨졌기 때문인데요.

이들은 일본인 농장주로부터 당시 제주지역의 인프라로는 접할 수 없었던 농약 관련 지식이나 비료 시비 기술, 전지전정 기술을 습득했고 이를 바탕으로 초기 감귤 산업을 일궈냈다고 합니다. 제주도민으로서 실질적으로 감귤산업을 일으킨 선구자였던 셈입니다.

처음 제주에 감귤산업의 가능성을 포착해 온주밀감을 도입했던 타케 신부와 박영효 등이 1세대라면, 이후 일본인 농장주로부터 기술을 배우고 익혀 실제 몸으로 뛰면서 감귤산업을 일으킨 이들이 2세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감귤산업의 3세대는 1960년대 박정희 대통령의 감귤산업 장려 정책으로 본격적인 탄력을 받기 시작하면서 감귤농업에 뛰어든 이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3세대에는 농업인 외에도 감귤 관련 연구에 매진했던 연구자들과 감귤 기술보급에 힘썼던 사람들, 감귤농업조합을 일으켰던 초창기 발기인들, 일본에서 묘목을 들여온 묘목 사업자들 등도 여기에 포함될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제주도민의 노력 속에서 발전한 감귤산업으로 감귤나무는 공납의 폐단으로 백성의 원성을 샀던 천덕꾸러기에서 자식들의 공부를 시킬 수 있도록 하는 최고의 소득작목으로 '대학나무'라는 애칭까지 얻게 됐습니다.

앞서 언급한 감귤전문가는 "박정희 당시 정부의 감귤 장려정책으로 도로 개설이나 수로, 관로 등 인프라가 구축되면서 큰 도움을 받은 건 사실이다. 장려정책이 없었으면 감귤산업의 발전이 20~30년 뒤로 밀렸을 것"이라면서도 "수도관 하나 없는 땅을 일구고 변변한 연장도 없이 과원을 일으킨 도민들의 공 역시 잊어선 안 된다"라고 강조했습니다.

한편, 이후 제주감귤 산업은 민·관의 노력 속에서 꾸준히 성장세를 이어가게 됩니다. 감귤 장려정책 지시가 내려진 지 8년 만인 1972년엔 감귤 생산량이 최초로 1만 톤을 넘게 됐고, 이후 5년 만인 1977년엔 10만 톤의 생산량을 기록합니다. 2002년에는 78만 8,679톤으로 역대 최대 생산량을 기록했고, 최근엔 적정량을 감안해 약 60만 톤 내외의 생산량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JIBS 제주방송 신동원 (dongwon@jibs.co.kr)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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