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자들의 ‘취재 거부 자유’를 불허하라 [세상에 이런 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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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력 정치인이 언론사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을 대리한 적이 있다.
'취재를 거부할 자유'는 권력을 잡은 정치인들에게 늘 매력적인 문구다.
적어도 공인의 지위에 있는 사람이 '취재를 거부할 자유'를 주장하며 취재 요청에 명시적으로 응하지 않은 경우에는, 언론사를 상대로 법적 조치를 취하기 어렵도록 제도 보완이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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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력 정치인이 언론사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을 대리한 적이 있다. 정치판에서 산전수전 겪은 덕분인지 그의 대응은 노련했다. 이 정치인의 대응을 요약하면 이렇다. ‘취재 요청에는 응하지 않는다. 입장 표명과 해명은 지지 세력이 주로 이용하는 유튜브 채널을 통해서 한다. 형사고소를 하되 공직선거법 위반죄와 명예훼손죄를 각 별건으로 고소한다. 언론사를 상대로 반론보도 청구 소송을 제기하고, 기자 개인만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한다.’
이런 전략을 구사하면 보도를 한 기자가 여러 차례 수사기관과 재판에 불려 다니게 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 무혐의 처분을 받고 민사소송에서 승소하더라도, 기자 개인 처지에서는 대응 과정 자체가 스트레스다. 소모되는 시간과 노력은 그 누구도 보상해주지 않는다. 어지간한 전투력이 아니고는 그 정치인을 상대로 또다시 의혹 제기 보도를 할 마음을 먹기 쉽지 않다. 정치인 처지에서는 ‘졌지만 잘 싸운’ 셈이다.
앞으로 이런 전략을 구사하는 정치인들은 더욱 늘어날 것이다. 소수의 언론사가 여론 형성 기능을 주도하던 과거와 달리, 다양한 매체를 통하여 여론이 형성되는 시대다. 유력 정치인은 직접 혹은 자신에게 우호적 매체만 선택해 의견을 밝힐 수 있다. 굳이 언론사 취재 요청에 피곤하게 응할 유인이 사라진다. 취재에 응하지 않고 취재에 대해 사후 법적조치를 취하는 편이 유리하다는 계산이 서기 쉽다.
이럴 때 반론보도 청구는 유용한 도구로 사용된다. 반론보도 청구는 정정보도 청구나 손해배상 청구와 달리 보도된 내용이 ‘허위’일 것까지는 요구하지 않는다. 기자나 언론사 처지에서는 거듭된 취재 요청에 응하지 않고 뒤늦게 반론보도를 청구하는 것이 ‘반론권의 남용’이라고 주장해도, 법원에서 ‘권리의 남용’까지 인정받기는 쉽지 않다.
물론 반론을 충분히 보도하는 것은 언론의 당연한 의무다. 그러나 언론은 왜곡 없이 사실관계를 균형 있게 전달할 뿐 아니라, 공직자의 해명이 사실에 부합하는지 검증하고 해석할 의무도 있다. 정치인이 취재 요청에는 불응하면서 반론보도 청구권만을 행사하는 것은, 언론을 향해 자신의 입장에 추가적 해석이나 비판을 더하지 말고 전달만 하라는 요구다. 이는 국민의 감시와 비판을 감수하고 자신에게 제기된 의혹에 관해 설명할 의무가 있는 공직자로서 의무를 방기하는 것이다.
“국민 혈세를 쓰는 정부는 취재당할 의무가 있다”
최근 홍준표 대구시장이 특정 언론사를 상대로 모든 취재를 거부하라고 조치해 논란이 되었다. 이른바 ‘바이든·날리면’ 논란 이후 대통령실이 MBC 기자들에게 전용기 탑승을 불허하면서 비판 여론이 일자, 홍 시장은 “취재의 자유가 있다면 취재 거부의 자유도 있다”라며 대통령실을 감쌌다. ‘취재를 거부할 자유’는 권력을 잡은 정치인들에게 늘 매력적인 문구다.
2007년 노무현 정부 시절에도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은 “취재원에게 취재 거부의 자유는 있는 것 아니냐”라고 말해 논란이 되었다. 당시 한나라당 대변인은 “국민의 혈세를 쓰는 정부는 취재당할 의무가 있다”라며 “터무니없는 주장”이라고 반박했다. 그때 그 정치인들이 여전히 같은 생각인지 궁금하다.
달라진 미디어 환경에서 지금과 같은 반론보도 청구 제도가 여전히 유효한지 논의해볼 필요가 있다. 적어도 공인의 지위에 있는 사람이 ‘취재를 거부할 자유’를 주장하며 취재 요청에 명시적으로 응하지 않은 경우에는, 언론사를 상대로 법적 조치를 취하기 어렵도록 제도 보완이 필요하지 않을까. 취재 거부가 아닌, 반론을 통해 상대를 설득하는 정치인을 보고 싶다.
이혜온 (변호사)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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