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분만 늦게 출발했어도"…지옥이 된 그날 저녁 쇼핑몰, 남편의 눈물
"(휴대전화로 찍은 사고 현장을 보여주며) 여기에 꽃이라도 하나 놔주세요. 부탁합니다."
경기 성남시 서현역 흉기 난동 사건 피의자가 몰던 차량에 치여 중상을 입은 60대 A씨의 남편은 4일 오후 분당차병원 중환자실 앞에서 이같이 말했다.
A씨 남편은 "실감이 나지 않는다"며 "5분만 늦게 출발했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텐데 아내를 못 지켜준 게 정말 미안하다"고 밝혔다. 그는 "아내의 상태가 전날보다 더 안 좋아졌다"며 통곡했다.
A씨는 지난 3일 심정지 상태로 병원에 이송됐지만 다행히 심장 박동이 돌아왔다. 현재는 인공호흡기를 낀 상태로 입원 치료를 받고 있다. 위기는 넘겨졌지만 의식이 돌아오지 않는 상태에서 오후에 갑작스럽게 혈압이 낮아지며 다시 상태가 악화했다.
사고 현장인 'AK플라자 분당' 백화점 인근에 사는 A씨 부부는 당시 외식을 하려고 나와 백화점에서 100m쯤 떨어진 아파트 단지와 상가 사이의 인도를 걷고 있었다.
그렇게 평온하게 길을 걷던 A씨는 흉기 난동 사건 피의자인 배달업 종사자 최모씨(22)가 몰고 있던 모닝 차량에 들이받혔다. 최씨는 A씨와 부딪친 이후 인도를 내달려 다른 시민들을 또 들이받았다.
A씨 남편은 "차가 인도로 들어올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냐"며 "정신을 차렸을 때는 아내가 쓰러져서 피를 흘리고 의식이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주변 사람들이 119·112에 신고해라 소리를 질렀다"고 회상했다.
A씨의 상태가 악화했다는 소식을 들은 A씨 언니들도 이날 오후 중환자실에 들어가 A씨와 면회를 하고 나왔다. 이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한동안 대기실에서 눈물을 흘렸다.
경찰과 소방 당국에 따르면 최씨는 지난 3일 오후 5시59분쯤 모친 명의의 모닝 차량을 타고 성남시 서현역 'AK플라자 분당' 앞 인도로 돌진해 5명을 들이받았다. 차에서 내린 그는 바로 백화점 건물 안으로 들어가 1, 2층에 있던 손님 등에게 무차별적으로 흉기를 휘둘러 9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경찰은 사건 직후 최씨를 붙잡아 조사를 진행 중이다. 경찰 관계자는 "최씨가 자신을 해하려는 스토킹 집단에 속한 사람을 살해하고 이를 통해 스토킹 집단을 세상에 알려야 한다는 망상에 빠져 범행을 결심한 것으로 조사됐다"고 밝혔다.
경찰은 최씨가 2020년 '조현성 인격장애'(분열성 성격장애) 진단을 받은 받은 사실, 대인기피증으로 고등학교를 자퇴한 사실 등을 고려해 피해망상 등 정신질환에 따른 단독 범행을 벌였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수사를 진행 중이다.
경찰은 이날 중 범행경위, 동기 등에 대한 수사를 마무리한 뒤 구속영장을 신청할 예정이다. 최씨에게 범죄 전력은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체포 직후 실시한 마약 간이 검사 결과는 음성으로 나타났다.
분당 서현역 칼부림 피의자가 분열적 성격 장애 진단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지면서 심신미약 상태를 인정받아 감형될지에 관심이 쏠린다.
형법 제10조는 심신장애로 인해 사물을 변별하거나 의사 결정할 능력이 없는 사람의 행위에 대해서는 벌하지 않고 미약한 사람의 행위에 대해서는 감형이 가능하다고 규정한다. 법조계에서는 다만 정신질환으로 인한 감형 사례가 소수에 불과한 데다가 이번 사고가 강력 범죄라는 점에서 감형은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에 무게를 둔다.
실제 판례에서도 피의자가 정신질환자로 인정되더라도 감형 받는 사례가 많지 않다. 정웅석 한국형사소송법학회장은 "형법 조문만 따지면 심신미약에 대해 무죄까지 가능하지만 실제 판결에서 이를 인정해 감형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며 "우리나라에서 심신미약을 인정받으려면 환청이나 망상에 빠져있어야 하는 등 외국에 비해 까다롭다"고 말했다.
법원은 피고인에게 심신장애 등의 징후가 있을 경우 국립법무병원 등 정신의학과 병원에 감정을 촉탁하고 감정 결과를 근거로 형을 선고한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질환이 범죄를 저지르는 데 직접적인 요인이 됐는지, 강력한 증상 발현 때문에 범행을 막을 수 없었는지 등을 따지기 때문에 정신질환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감형하는 사례는 거의 없다.
이승우 법무법인 법승 대표변호사는 "정신질환자자가 단발적이거나 우발적으로 충동적인 공격행위를 한 뒤 피해자에게 사과하고 합의가 됐다면 감형이 될 가능성도 있다"며 "법원은 범죄의 경중을 따져 강력 범죄인지를 판단하고 운전이나 친구·가족과 대화 등 정상적인 사회 생활에서도 통제능력이 제대로 작용하지 않는지 등을 종합적으로 살핀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재판 과정에서 정신의학자가 질환이 있는지를 감정하는 데 질환이 있는지 여부보다 중요한 것은 법원의 최종 판단"이라며 "판사가 이를 근거로 질환과 범죄 행위 사이에 구체적인 영향이 있는지, 범행 당시 피의자가 어느 정도의 증상이 발현된 것인지 등을 살피다 보니 감형하는 사례가 드물다"고 밝혔다.
흔히 '묻지마 범죄' 피의자에게서 나타나는 사이코패스 성향은 심신장애나 심신미약으로 분류되지 않기 때문에 감형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
이 변호사는 "사이코패스는 아직 정신질환으로 보지 않고 성격장애 일종으로 분류된다"며 "심신미약 문제와는 다르기 때문에 이에 대한 판단도 달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범죄 심리 전문가들은 경기 성남시 서현역 인근 백화점에서 흉기 난동을 벌인 20대 남성 A씨가 지난달 서울 관악구 신림동에서 유사 범행을 한 피의자 조선(33)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약 2주만에 비슷한 사건이 발생한만큼 추가 범죄 가능성을 염두에 둔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도 조언했다.
4일 경찰 등에 따르면 지난 3일 저녁 5시59분쯤 서현역 'AK플라자 분당'에서 배달업 종사자 A씨(22)가 무차별적으로 흉기를 휘둘러 9명이 다쳤다. 백화점에 들어가기 직전에는 모친 명의 모닝 차량을 몰고 인도로 돌진, 5명의 피해자가 발생했다.
경찰은 사건 직후 A씨를 붙잡아 조사를 진행 중이다. 그는 경찰 조사 과정에서 "특정 집단이 자신을 스토킹하며 괴롭히고 죽이려 한다. 자신의 사생활을 전부 보고 있다"고 진술했다. 경찰은 A씨가 피해망상 등 정신적 질환에 따른 범행을 저질렀다고 본다. 그는 대인기피증으로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정신의학과에서 분열성 성격장애 진단을 받은 것으로 파악됐다.
◇전문가 "서현역 사건, 신림역 모방…유동인구 많은 지역·시간대가 유사"
전문가들은 서현역 사건을 사실상 신림역 사건의 모방범죄로 봤다. 상세한 범행 방식이나 동기는 다를 수 있어도 유동인구가 많은 장소·시간대를 골라 무차별적으로 시민을 공격했다는 점에서 유사하다는 것이다.
A씨는 서현역 부근 AK플라자에서 범행을 저질렀다. 이곳은 하루 유동인구가 18만명에 달한다. 인근 현대백화점 판교점 다음으로 규모가 크다. 조씨가 지난달 21일 범행을 저지른 신림역 인근 역시 서울지하철 2호선이 지나 유동인구가 많은 지역이다.
대형마트에서 흉기를 구해 범행을 저질렀다는 점도 유사하다. A씨는 범행 전날, 조씨는 범행 10분 전에 인근 마트에서 흉기를 챙겼다. 범행시각 역시 A씨는 저녁 6시쯤, 조씨는 낮 2시쯤으로 활동하는 사람이 많은 시간을 택했다.
전문가들은 A씨가 조씨 사건에 큰 자극을 받았을 가능성에 주목했다. 배상훈 우석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방법적인 모방보다 자극을 받아 범행한 사건일 가능성이 높다. 전체적인 범죄의 형태에서 유사점이 많다"며 "사람이 많은데에서 날카로운 흉기를 이용했다는 점이 유사하다"고 말했다.
배 교수는 "A씨 같은 성격장애는 평소에는 괜찮아보일 수 있다"면서도 "언제든 외부 사건이나 행동에 자극을 쉽게받는 '피암시성'이 높아 모방범죄 노출이 어렵지 않은 편"이라고 설명했다.
김상균 백석대 경찰학부 교수도 "정신질환이 있다고 해서 무조건 범행을 하고 다른 사람을 공격하는 건 아니다"면서도 "(신림역 흉기 난동을 비롯해) 최근 일련의 사건들이 A씨의 피해망상을 오히려 증폭시켰을 것"이라고 했다.
◇추가 범죄 가능성…"경찰의 가시적 활동 중요"
문제는 이 같은 범행을 모방한 추가 범죄가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신림동 흉기 난동 사건 이후 유사 허위 '살인예고' 글이 온라인을 통해 퍼지고 있어 이에 자극을 받은 사람들이 모방 범죄를 또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서현역 사건 이후 분당 오리역, 서울 잠실역 등에서 살인을 저지르겠다는 예고글이 온라인 상에서 유포 중이다. 경찰은 서울청 강력범죄수사대 내 전담대응팀을 구성해 엄정 대응하겠다는 방침이다.
전문가들도 경찰의 강한 처벌 메시지와 선제 대응을 주문했다. 김 교수는 "가시적인 경찰의 활동이 중요하다"며 "적극적인 범인 검거·처벌 등을 담은 강한 메시지를 계속 전달하고 다중이 모이는 장소에 순찰 활동을 강화하는 등 법 집행활동이 필요한 시기'라고 말했다.
성남(경기)=양윤우 기자 moneysheep@mt.co.kr 이강준 기자 Gjlee1013@mt.co.kr 박다영 기자 allzero@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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