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개울은 말라버리고, 폭염 속 살인만 남는다면 [황덕현의 기후 한 편]
마른 날씨 속 스릴러…현실서도 기온 1도 오르면 폭력범죄 5%↑
[편집자주] 기후변화는 인류의 위기다. 이제 모두의 '조별 과제'가 된 이 문제는, 때로 막막하고 자주 어렵다. 우리는 각자 무얼 할 수 있을까. 문화 속 기후·환경 이야기를 통해 기후변화에 대한 관심을 끌고, 나아갈 바를 함께 고민해 보고자 한다.
(서울=뉴스1) 황덕현 기후환경전문기자 = 전례 없던 '극한호우'가 퍼부었던 장마철이 지난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적당량의 비'는 내렸으면 하는 주말이다.
온열질환으로 병원 신세를 지진 않더라도 머리가 아프고 어지럽다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들리고, 아스팔트나 숲, 수확을 앞둔 논밭이 바싹 마른 게 눈으로 보일 정도다.
이런 최악의 상황은 한국만의 일은 아니다. 인도의 올여름 낮 기온이 45도까지 올라가면서 며칠 만에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었고, 미국 서부의 기온은 54도까지 올라가면서 약 9300만명이 폭염을 앓았다.
남반구의 호주도 마찬가지다. 우리와는 계절이 반대로, 현재 겨울인 호주는 최근 낮 최고기온이 25도를 웃돌면서 역사상 가장 따뜻한 겨울을 보내는 중이다. 로버트 코놀리 감독의 2020년 작품 '더 드라이'(The Dry·가뭄)는 이렇게 기후변화로 '날씨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는 호주 빅토리아주 윔메라(Wimmera)를 배경으로 촬영됐다.
'더 드라이'는 기본적으로 친구 사이의 우정과 배신, 좁은 지역사회 내 갈등이 배경인 미스터리 범죄 스릴러 영화다. '헐크', '니모를 찾아서', '블랙 호크 다운'으로 인기를 끈 에릭 바나(Eric Bana)가 주연을 맡았으나 개연성이 약한 결말과 마케팅(판촉) 실패로 국내 관객은 1만명을 달성하는 데도 실패했다.
정작 이 영화에서 주목되는 것은 영화의 배경이 되는 광활한 자연과 로버트 코놀리 감독의 영화관이다.
'가뭄'을 뜻하는 영화 제목처럼 에릭 바나가 연기한 에런 포크(Aaron Falk)의 고향 마을은 말라버렸다. 그가 고향을 떠나기 전 청소년기를 보냈던 개울과 낚시터는 어른이 돼 다시 찾았을 때 마른 풀만 무성한 곳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런 가문 지역의 기후 특성은 고향 마을 사람들의 정신도 황폐하게 만든 듯했다. 마을 내 살인 사건은 대낮에 가장 안전해야 할 집안에서 발생하는가 하면 죽음의 진실을 마을 주민들이 침묵하게끔 하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더 드라이'는 미국 작가 제인 하퍼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로버트 코놀리 감독은 원작에 한국 국토 면적과 비슷한 1000만㏊가 소실된 2019~2020년 초대형 산불과 이에 따른 황폐함을 영화에 꾹꾹 담았다. 약 300명밖에 살지 않는 마을을 덮쳤던 화마, 이를 배경으로 촬영된 영화는 기후변화에 따른 재난이 얼마만큼 우리 주변 가까이에 와 있는지를 실감케 했다. 이 영화에서는 비가 내리는 장면이나 따뜻하거나 로맨틱한 모습은 단 한 차례도 등장하지 않았다.
한편 로버트 코놀리 감독은 이 영화 후속 작품으로 올해 '블루 백'(Blue Back)을 공개했다. 해양 생태계 보전을 주제로 한 이 작품을 연이어 찍으며 그는 '타이타닉'을 촬영하면서 환경 운동가가 된 제임스 카메론(캐머런) 감독이나 '비치'를 찍으며 환경 운동가가 된 리어나도 디캐프리오(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처럼 '환경 영화인'의 반열에 이름을 올렸다.
장기화한 가문 날씨, 그 속에서 발생한 사건·사고는 최근 연이어 발생하고 있는 '칼부림 사건'을 떠오르게 한다. 그 어떤 범죄도 날씨를 이유로 정당화될 수 없지만 실제 기온과 범죄의 연관성이 증명된 바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영국 옥스퍼드대와 스위스 취리히대 공동연구팀은 세계경제포럼(WEF)을 통해 고온과 정신건강에 관한 보고서를 냈다.
공동 연구팀은 세계 각국의 정신건강 연구 사례를 검토했고, 주변 온도가 1~2도 올라가면 폭력 범죄가 3~5% 증가할 수 있다고 발표했다. 아울러 2090년까지 기후변화로 모든 범주의 범죄가 전 세계에서 최대 5%까지 증가할 것으로 추정했다.
기상청 중기예보를 보면 메마른 날씨는 앞으로도 한동안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겨울은 또 무지 추울지 모르겠다. 기온 상승을 막기 위한 탄소 배출 저감과 함께 이미 진행 중인 기후 재난과 이 영향을 받는 모든 영역에 대한 대비책이 필요한 때다.
ace@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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