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같은 유럽마을인데…잘린 사람머리 그림이 잔뜩 발견됐다고? [사색(史色)]

강영운 기자(penkang@mk.co.kr) 2023. 8. 5. 07:0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사색-33] 꿈에 그리던 여행지였습니다. 맛있는 음식과 예스러운 느낌의 마을은 마치 중세 시대에 들어간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하지요. 또 싼 가격은 어떻고요. 서유럽에서는 대부분의 여행객이 지갑이 비어가는 것을 느끼지만, 이곳에서만큼은 상점 앞에서 주눅이 들 필요가 없어지지요. 바로 헝가리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섬찟한 점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아름다운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보인 ‘문장’(Coat of Arms) 때문이었습니다. 사자·독수리·곰으로 자신들의 용맹을 표현하는 평범한 마을과는 사뭇 달랐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문장기에는 사람의 잘린 머리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까마귀가 머리를 파먹는 그림은 섬찟하기 그지없습니다.

이탈리아 화가 카르바조의 홀로페르네스를 참수하는 유디트.(1598년)
한 지역의 특이한 사례는 아닙니다. 동유럽 곳곳에서 이 장식을 발견할 수 있어서입니다. 문장은 나라의 국기와 같습니다. 일종의 얼굴 역할을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동유럽 마을들은 왜 잘린 머리를 자신의 문장으로 삼은 것이었을까요.

동유럽인이 그로테스크한 것을 즐겨서가 아닙니다. 켜켜이 쌓인 역사적 사건이 문장의 모양을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유럽 문장의 역사를 오늘 돌아봅니다.

체코 귀족 슈바르첸베르크 가문이 1599년부터 사용한 문장.
동유럽 섬찟한 문장의 비밀
“적들에게 두려움을 줄 문장이 필요합니다.”

동유럽은 아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습니다. 유럽으로 가는 관문인 셈이었지요. 그만큼 수 많은 침략을 받았습니다. 특히 7세기부터 이슬람 국가들이 세력을 넓히면서 동유럽은 엄청난 공격을 견뎌야만 했습니다.

1453년은 유럽 위기의 해로 기록됩니다. 이슬람의 맹주 오스만 제국 때문이었습니다. 지도자 메흐메트 2세가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킵니다. 동부유럽은 메흐메트 2세의 앞마당이 되었지요. 침략은 수시로 이어졌고, 약탈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기독교도들은 신께 기도를 드리는 일 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19세기 이탈리아 화가 파우스토 조나로가 그린 메호메트2세의 콘스탄티노플 점령.
가장 많은 표적이 된 나라가 헝가리였습니다. 국토가 광활한 평원으로 되어 있던 탓에 이민자들의 진입이 매우 쉬웠지요. 오스만 제국은 이 땅을 무대 삼아 마음껏 약탈을 자행했습니다.

공공의 적은 공동체를 끈끈하게 연결하는 촉매가 되기도 합니다. 헝가리와 크로아티아 등 동유럽의 마을들은 이슬람 세력에 당하고만 있지 않았지요. 주민들 스스로가 뭉쳐서 싸웠고, 기독교적 정신을 지키고자 무딘 애를 썼습니다. 그 의지를 담아낸 것이 바로 문장이었지요. 야만족의 목을 친 그림을 내걸었던 것입니다.

플랑드르 화가 프란체스코 게펠스가 그린 1683년 비엔나 전투. 이슬람 세력의 침략을 막기 위해 유럽 각국이 지원군을 보냈다. 이 이후로 이슬람 세력은 유럽을 다시는 넘볼 수 없었다.
‘주적’ 터키인들의 머리를 주로 그렸기에 이를 ‘Turk Head’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적들에겐 경고를, 내부엔 결속을 주는 상징이었지요. 우리나라가 문장을 만들었다면, 아마 왜구의 잘린 머리가 그 자리에 있었을 것입니다.
“다시 또 침략하면 이 모양이 될 것이야.” 헝가리 마을 데레스크의 문장.
문장 이전의 상징물...로마의 독수리
문장이 처음 등장한 건 이렇듯 중세 유럽에서였습니다. 하지만 그 이전에도 시각 상징물은 존재했습니다. 고대 그리스 로마부터였습니다. 그리스 항아리 암포라에 병사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림을 한번 같이 보시지요. 병사는 방패를 들고 있습니다. 방패 안에는 독수리·그리핀·사자·닭 등 여러 동물이 용맹함을 뽐내고 있습니다. 동물의 신체적인 능력이 병사에게 깃들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일종의 토테미즘적인 성격으로 문장을 새겨 넣었지요.

“나에게도 페가수스의 힘이 깃들기를.” 그리스 전사가 방패를 들고 페르시아 전사와 싸우는 모습. 방패 안에는 전설 속 동물이 그려져 있다. 아테네 국립 고고학 박물관 소장품.
제국은 무력으로만 운영되지 않습니다. 통합의 기제가 필요합니다. 고대 로마가 제국으로 거듭나면서 구성원들의 정신을 통일할 상징이 필요해졌습니다. 기원전 100년, 군인 출신 집정관 마리우스가 한 동물을 선택합니다. ’독수리‘였습니다. ’아퀼라‘라고 불린 로마의 독수리는 제국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서쪽 잉글랜드부터 동쪽으로는 서쪽으로는 서남 아시아까지 로마의 독수리가 뻗어나갔지요.
고대 로마의 아퀼라를 현대적으로 재현한 모습. <저작권자=MatthiasKabel>
전장에서 아퀼라 상은 늘 선봉이었습니다. 아퀼리페르라는 기수를 따로 두어 이를 관리하게 했지요. 가장 존경받는 전사만이 맡을 수 있는 직책이었습니다. 로마 군대는 전투에서 지는 것보다 아퀼라를 빼앗기는 걸 더 큰 치욕으로 여겼습니다.
로마의 자칭 계승자들은 앞다퉈 독수리를 내걸었다
제국은 끝나도, 그 상징은 남았습니다. 로마 제국을 계승했다고 주장하는 국가들이 나타나면서였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이 독수리 모양을 사용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습니다. 나폴레옹 역시 자신의 대관식에서 독수리 문장을 사용합니다. 유럽 왕가의 문장 중 독수리가 많은 것 역시 고대 로마의 영향입니다.
나폴레옹이 황제로 등극하면서 독수리 문장을 수여하는 모습을 묘사한 자크 루이 다비드의 1810년 작품.
하지만 독수리가 늘 숭고하게만 여겨졌던 것은 아닙니다. 고대 로마를 숭배한 또 다른 독재자의 존재 때문이었습니다. 히틀러였습니다. 독일의 제3제국을 선포하면서 히틀러 역시 독수리를 사용해 나치 문양을 만들었습니다. 제3제국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이유도 고대 로마가 제1제국, 신성로마제국이 제2제국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가 얼마나 로마를 숭배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지요.
아돌프 히틀러의 기. 로마제국의 상징물인 독수리가 그려져 있다.
문장의 시대를 연 십자군
다시 문장의 전성기인 중세로 돌아갑니다. 고대 로마가 멸망한 이후 문장의 시기가 열린 건 12세기부터입니다. 무기와 방어구의 질이 향상하면서 철갑을 두른 장군과 병사들이 많아졌지요. 전투에서 점점 사람을 식별하기 힘들어졌다는 의미입니다. 방패나 보호구 위에 문장을 새겨야 할 필요성이 커졌던 것이었지요.
웨스트민스터 외부에 세워진 리처드1세 동상. <저작권자=Mattbuck>
문장으로 유명한 왕 중 하나가 바로 잉글랜드 사자심왕 리처드였습니다. 십자군 전쟁에 직접 참전하기도 했던 그는 용맹함으로 “사자의 심장을 가졌다”는 평을 듣는 왕이었습니다. 이 별명이 썩 마음에 들었는지 그는 자신의 문장으로 사자를 사용하기 시작했지요. 나중에 사자는 세 마리까지 늘어갔습니다. ’삼 사자‘ 문장을 그의 후계자들이 계승하면서 잉글랜드 왕실의 문장으로 공식 사용되기에 이르렀지요.
삼사자는 영국 왕실의 문장에 그려져 있다. 리처드1세가 그 시작이었다.
분란의 역사가 담긴 문장
문장에는 분란의 역사도 새겨집니다. 프랑스와 전쟁을 일으킨 잉글랜드 에드워드 3세가 주인공입니다. 당시 잉글랜드 문장의 절반은 삼사자가 절반은 백합이 자리합니다. 영민한 독자분들은 눈치채셨겠지요. 맞습니다. 절반은 프랑스 왕실의 문장이었습니다. 에드워드 3세가 자신이 프랑스의 왕으로 선언했기 때문이었지요.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1세가 프랑스 필립 4세에게 봉건 서약인 ‘오마주’를 바치는 모습. 무릎 꿇은 에드워드 1세가 삼사자 문장이 새겨진 옷을, 프랑스 왕은 왕실의 상징인 백합 문양의 옷을 입고 있다.
프랑스에서 필립 4세가 사망하면서 분란의 씨앗이 싹 틉니다. 프랑스 의회는 필리프 드 발루아를 새 왕으로 옹립했지요. 하지만 에드워드 3세는 이에 반발했습니다. 에드워드 어머니 이사벨라가 필립 4세의 딸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왕위 계승 순위에서 앞선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프랑스와 잉글랜드 ’100년 전쟁‘의 시작이지요. 에드워드 3세는 자신이 정당한 프랑스의 왕위라는 뜻에서 문장에 삼사자와 함께 백합 문양을 넣었던 것입니다.
백년전쟁 이후 조지3세 시기까지 사용된 잉글랜드 왕실 문장. 자신들이 프랑스의 왕이라는 뜻에서 백합문양을 사분할로 넣었다.
백년 전쟁에서 패하고도 잉글랜드 왕들은 ’프랑스 왕‘ 타이틀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잉글랜드 왕실이 백합 문양을 폐기한 건 조지3세부터였습니다. 400년 넘게 프랑스 왕실의 백합을 자신들의 문장에 새겼던 것이었지요.
재치 있는 문장의 시대
문장이 언제나 무겁게 격식만 강조했던 건 아닙니다. 재기와 유머가 넘쳐흐르는 문장들도 많았기 때문입니다. 대문호 셰익스피어가 대표적입니다.
“난 문장(文章)에서도, 문장(紋章)에서도 평범함을 거부한다네.” 윌리엄 셰익스피어.
그의 문장에선 그의 유머감각이 빛이 납니다. 노란색 바탕에 검은 색 띠, 거기에 창이 흔들리는 모습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흔들리는(Shake), 창(Spear). 자신의 이름을 발음대로 문장으로 만드는 것이었지요.
성 트리니티 교회에 새겨진 셰익스피어의 문장. <저작권자=Sicinius>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어머니 보우스 라이언 여사도 활과 사자가 조합된 문장을 사용했습니다. 영국 윌리엄 왕세자의 부인인 케이트 미들턴 역시 결혼 직전 빨간색과 파란색이 조합된 문장을 창조했습니다. 두 색이 한 데 뭉치면 ’미들톤’(Middle Tone)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기자들이 자신의 이름으로 유희적 이메일 주소를 만드는 것의 원조였던 셈이지요.
현대에도 문장은 살아 숨 쉰다
문장은 봉건제도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여전히 우리 곁에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입니다. 독일의 명품 주방용품 회사인 헹켈의 쌍둥이 모양 역시 1731년에 처음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졸링겐 지역의 대장장이 길드 조합이 등록한 쌍둥이 로고는 이제 전 세계 주방을 점령했지요.
독일의 칼 브랜드 헹켈의 쌍둥이 로고. 18세기부터 사용됐을 정도로 유서가 깊다.
축구를 좋아하는 분들에게도 문장은 현재진행형 역사입니다. 2010년 인터밀란 어웨이 티셔츠 로고에는 불을 뿜어대는 뱀의 모습이 담겼습니다. 밀라노를 지배한 비스콘티 가문의 문장이었습니다. 비스콘티 가문은 십자군 전쟁에 출전해 사라센 장수를 죽이고 그 장수의 상징을 자신의 문장으로 삼았다고 전해집니다. 인터밀란은 자신의 지역 기반인 밀라노의 역사를 유니폼에 새겨 넣은 것이었습니다.
밀라노를 지배한 비스콘티 가문의 문장.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로고로 둘러싸인 삶을 살아갑니다. 축구를 볼 때도, 넷플릭스를 시청할 때도, 커피를 한 잔 할때 조차도 그렇습니다. 이번 주말에는 로고를 한번 유심히 봐 보시는 건 어떠신지. 미처 몰랐던 역사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니까요. 역사의 색을 탐미하는 건 언제나 즐겁습니다.
대한제국에 사용된 엠블럼. 러시아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저작권자=Samhanin>
<네줄요약>

ㅇ문장(Coat of Arms)은 역사를 담은 상징이다.

ㅇ잉글랜드 왕실은 프랑스 왕실의 백합 문양을 자신들의 문장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자신들이 프랑스 왕이라는 뜻이었다.

ㅇ동유럽에는 잘린 터키인 머리를 문장으로 사용하는 지역이 많다. 그들로부터 많은 침략을 받았기 때문이다.

ㅇ셰익스피어는 문장을 통해 재치를 뽐냈다. 흔들리는(Shake) 창(Spear) 그림이었다.

<참고문헌>

ㅇ김경화 외, 문장과 함께하는 유럽사 산책, 글항아리, 2019년.

역사(史)에 색(色)을 더하는 콘텐츠 사색(史色)입니다. 역사 속 외설과 지식의 경계를 명랑히 넘나듭니다. 가끔은 ‘낚시성 제목’으로 알찬 지식을 전달합니다. 기자 페이지를 구독해주세요. 매주 토요일 알롱달롱한 역사를 들고 찾아뵙겠습니다.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