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지마 범죄', 개인에서 사회로 동기 옮겨간 '이유 있는 범행'…"새 치안책 절실"
일면식도 없는 불특정 다수를 해하는 범행이 연일 전국을 공포에 빠뜨리면서 대책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묻지마 범죄’(이상동기 범행)으로 불리는 이들 범죄는 실상 개인에서 사회로 범행 동기가 옮겨간 ‘이유 있는 범행’이며, 변화한 양상에 맞춘 새 치안책이 도출돼야 한다고 진단한다. 이와 함께 이들 유형 범죄자의 재범율을 줄이기에는 현재 국내 교화 시스템이 가진 한계가 커 개선이 필요하다는 주문도 제기된다.
▮묻지마 범죄, 사회 향한 ‘이유 있는 범행’
묻지마 범죄 상당수는 내면의 분노에서 비롯된 ‘이유 있는 범행’이다. ‘신림역 흉기 난동’의 조선이 대표적이다. 조선은 지난달 21일 일면식도 없는 행인에게 흉기를 휘둘러 1명을 살해하고 4명을 다치게 했다. 경찰 조사에서 그는 “열심히 살았는데도 불행해 남들도 나처럼 불행하게 만들고 싶었다”고 진술했다. 자신의 분노를 특정인이 아닌 불특정 다수, 즉 ‘사회’를 향해 폭력적 방식으로 뱉어낸 것이다.
범죄의 표출 대상이 개인에서 사회로 옮겨가고 있는 것으로, 범죄 이유가 사라진 게 아니라는 주장이 나온다. 치안 환경이 바뀌어 새 방책이 필요해졌다는 거다. 건국대 이웅혁(경찰학과) 교수는 “사회적 기대 수준은 높아졌는데 성취 수단은 봉쇄돼 정신적인 외로움, 사회로부터의 유리, 좌절을 느낀 이들이 불쾌 감정의 해소 방법으로 불특정 다수를 해하는 현상이 나타난다”며 제3자가 볼 때는 이상한 범죄지만, 당사자에게는 이유가 있다. 그 이유가 내면에 누적돼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사회 규범과 제도의 변화가 야기한 현상으로 국가 정부 차원의 고민과 해결이 필요하지만 지금까지는 그런 노력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짚었다.
학계는 이 같은 유형의 범죄자가 지닌 공통 특성을 찾으려 한다. 일례로 광운대 범죄연구소 안상원 박사는 230건의 묻지마 범죄 1심 선고를 분석한 논문 ‘이상동기 범죄에 대한 고찰 및 성향 분석’(2021년)에서 이상동기 범죄자의 유형을 ▷화풀이 ▷이유 없음 ▷정신병의 3가지 유형으로 제시했다. 피고인 수로는 ‘이유 없는 범죄자’가 127건(56.7%)으로 가장 많았다. ‘이유 없는 범죄자’는 직장이나 경제력 등 사회불만에 높은 영향을 받았으며, 불특정 다수에게 우발적으로 상해를 가한 경우가 가장 흔했다. 그 뒤를 이은 ‘화풀이형 범죄자’(49건·21.9%)는 가정의 불화나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흉기를 이용해 계획적으로 살해하는 양상이 나타났다.
▮범행 체계화, 그 이후는?
국가 또한 묻지마 범죄 체계화를 추진 중이다. 공인된 이상동기 통계 등 분석·관리 방안이 없다는 지적을 해소하기 위해서다. 경찰은 지난해 1월 이상동기 범죄의 사례 분석과 대응책 마련을 위한 태스크포스를 꾸렸다. 조만간 피해자와의 관련성, 행위의 비전형성 등 내·외부에서 수렴한 판단 기준을 발표할 계획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수사기관이 발표한 이상동기 관련 통계는 2017년 대검찰청이 국정감사 때 제출한 비공식 통계가 사실상 유일하다. 당시 대검은 2012~2016년 묻지마 범죄로 분류돼 기소된 사건이 총 270건으로 상해가 142건(연평균 28.4건), 살인(미수 포함)이 63건(연평균 12.6건)이라고 밝혔다.
문제는 범죄 유형을 가치치는 것만으론 범죄를 예방할 수 있느냐는 점이다. 사례 분석 등을 통해 이상동기 범죄자의 유형을 파악해도, 실제 범행을 저지르지 않은 사람을 구속하거나 동향을 주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경찰청 관계자는 “미국만 해도 총기 난사 같은 일종의 묻지마 범죄가 일어나면 해당 지역의 경찰 배치를 강화한다거나, 총소리를 인식하는 장비를 도입하는 정도에 그친다”며 “옆집 이웃이 폭력적 면모를 보인다고 해서 체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고 말했다. 범죄의 전조 증상만을 가지고 수사기관이 나서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취지다.
범행 체계화 자체의 모호함도 지적된다. 처음엔 무동기 범죄로 판단됐으나 이후 내심의 동기를 가진 범행으로 드러난 경우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일례로 ‘부산 금정 여대생 살해 사건’의 정유정은 최초 “살인을 해보고 싶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이후 주거지 압수수색 등을 통해 자신의 불우한 가정 환경 등에 의해 쌓인 분노를 표출할 목적의 계획 살인을 저지른 것으로 나타났다.
▮“교화 못 하는 교정시설 바뀌어야”
전문가들은 범행의 체계화와 함께 교화 체계 또한 함께 개선돼야 한다고 본다. 출소자가 곧장 사회로 ‘던져지는’ 국내 교화 방식으로는 한계가 크다는 것이다. 동의대 박철현(경찰행정학과) 교수는 “미국은 중간처우시설이 활성화됐다. 가석방 등으로 보호감호 처분을 받은 이들이 주거형·반주거형으로 운영되는 중간처우시설로 들어가 사회 안착을 위한 여러 심리프로그램을 제공받는다. 국내는 출소자가 한 달에 한 번 정도 보호관찰소를 다니며 약물 검사 정도를 수행하는데, 사실상 출소하면 곧바로 지역사회에 맡겨지는 구조다”고 설명했다. 중간처우시설은 4~10개월간 사회적응 문제요인을 심층 분석하고 그 해결책을 제시하는 수형자 사회 복귀 기관이다.
특히 묻지마 범죄는 살인·상해·폭행과 같은 강력범죄가 대부분이란 점에서 중간처우시설의 필요성은 더욱 높다. 학계에 따르면 위험 정도가 높다고 평가받는 수감자에게 더욱 효과적이라는 연구 결과가 다수 소개돼 있다. 국내엔 2009년 안양교도소를 시작으로 처음 도입됐으나, 현재까지 전국 54개 교정시설(교도소·구치소) 중 5곳에 그친다.
박 교수는 “결국 우리나라는 교도소에서 수감자의 교화 업무를 전부 담당해야 하는 셈인데, 심각한 과밀 현상을 겪는 국내 교정시설에서 교화다운 교화가 이뤄지길 기대하긴 어렵다”고 덧붙였다. 실제 지난해 기준 전국 교정시설의 수용률은 104.36%(정원 4만8980명 대비 1일 평균 수용 인원 5만1117명)에 육박했다. 코로나19 직전인 2019년에는 과밀도 113.8% 수준으로 더 심각했다.
인력 상황으로 볼 때 국내 교정시설의 교화 역량에는 의문이 따른다. 법무부에 따르면 전국 교정시설 중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진주교도소에 배치된 1명이 전부다. 정신질환 등으로 범죄를 저질러 치료감호가 선고된 이들을 담당하는 기관 역시 국립법무병원이 유일하다. 나머지 치료 수요는 민간 파견 인력이나 화상 진료로 메우는 실정이다. 지속적인 모니터링을 통한 상세 진단, 그에 따른 적극적 개입은 힘들다.
이에 대해 법무부 관계자는 “교정시설을 담당하는 법무부는 별다른 이유 없이 불특정인을 상대로 범죄를 저지른 수형자의 재범 방지를 위한 맞춤형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다. 치료가 필요한 경우에는 곧바로 의사와 대면 진료를 주선하고 있고, 주기적으로 상담과 약 처방 등을 진행하고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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