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소·극·장] "일하다 언제든 바다로 풍덩"… '워케이션의 성지' 제주 세화리를 아시나요

김영헌 2023. 8. 5.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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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소·극·장: #3 제주 세화리]
마을회관 리모델링… '공유오피스' 마련
'워케이션' 입소문, 올해 예약 조기 마감
'텃세' 無, 진입장벽 낮추자 주민도 증가
편집자주
지역 소멸위기 극복 장면, '지역 소극장.' 기발한 아이디어와 정책으로 소멸 위기를 넘고 있는 우리 지역 이야기를 격주 토요일 상영합니다.
제주 제주시 구좌읍 세화리 마을 전경. 세화마을협동조합 제공

지난달 18일 오후 제주 제주시 구좌읍 세화리 해안에 위치한 ‘질그랭이 거점센터’. 이곳은 2020년 세화리 주민들이 마을회관을 리모델링해 만든 건물이다. 1층은 세화리사무소, 2층은 카페, 3층은 공유오피스, 4층은 숙박시설로 사용된다. 센터 3층 공유오피스에서 슬리퍼에 반바지 차림으로 근무하던 김시호(47)씨가 노트북 화면에서 시선을 돌려 창밖을 내다보니 세화 쪽빛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하얀 모래사장에는 형형색색의 파라솔들이 펼쳐져 있고, 피서객들이 물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순간 김씨와 옆에 있던 동료의 눈이 마주쳤다. 둘은 약속이나 한 듯 노트북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4층 숙소에 노트북을 갖다 둔 뒤 건물 밖으로 나섰고, 2분도 채 안 되는 거리를 걸어 바닷속으로 뛰어들었다. 시원하게 수영을 마치고 나온 김씨는 “서울에선 상상도 못 하는 일이 이곳, 세화에서는 일상”이라고 활짝 웃었다. 그는 “시원하게 펼쳐진 푸른 바다를 보면서 일하다가, 기분이 내키면 바로 해변으로 뛰어갈 수 있다. 지옥철도, 출퇴근 시간도 없다. 업무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물론 쉴 수 있는 휴식 시간도 평소보다 더 많다. 두 마리 토끼를 잡는다는 게 이런 상황을 말하는 것 같다”고 했다. 서울 소재 유통회사에 다니는 김씨는 동료와 함께 이른바 ‘워케이션(workation)’을 위해 2박 3일 일정으로 세화리를 찾았다. 워케이션은 ‘일(work)’과 ‘휴가(vacation)’의 합성어다.


마을의 중심, 질그랭이 거점센터와 협동조합

제주 제주시 구좌읍 세화리에 위치한 질그랭이 거점센터 3층에 마련된 공유오피스 전경. 세화마을협동조합 제공

제주 동쪽 끝에 자리한 세화리는 ‘워케이션의 성지’라 불린다. 세화리는 코로나19가 한창이던 2021년 제주에서 처음으로 공유오피스를 운영했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재택근무가 확산되면서, 자연스럽게 새로운 근무 형태인 워케이션이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한 시기였다. 세화리 질그랭이 거점센터 공유오피스도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을 통해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고, 서울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노트북 하나만 들고 찾아오는 직장인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지난해에는 국내 대기업과 중소기업 직원 600여 명이 방문했다. 올해 상반기에도 450명이 다녀갔고, 하반기에도 550명이 예약을 완료하는 등 올해 방문객은 이미 조기마감됐다.

부지성 세화리 이장은 “공유오피스나 워케이션이라는 단어도 몰랐던 2020년에 한 이주민 부부가 마을 주변에 업무를 볼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고 제안했고, 고민 끝에 질그랭이 거점센터 3층 카페 공간을 공유오피스로 바꿨다”며 “그랬더니 코로나19 때문에 하루 2, 3명도 찾지 않았던 센터에 직장인과 관광객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때 이주민 부부의 제안이 ‘신의 한 수’였던 셈”이라고 설명했다.

세화리는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제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농어촌마을이었다. 주민들 대부분 당근 등 농사를 짓거나, 해녀 등 어업활동이 주를 이뤘다. 여느 농촌마을처럼 청년들은 하나둘씩 떠났고, 마을은 점차 고령화되면서 활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이 같은 마을 분위기에 위기의식을 느낀 주민들이 변화의 필요성에 대해 공감했고, 새로운 시도를 위해 뭉치기 시작했다. 마을회가 나서 정부의 마을사업 공모에 처음 도전했고, 2015년 농림축산식품부의 농촌중심지 활성화 사업 대상마을로 선정됐다. 사업비는 86억 원. 초등학생부터 노인들까지 모든 주민들이 한자리에 모여 어떤 마을사업을 해야 할지 논의했다. 활용도가 떨어져 폐건물이나 다름없던 마을회관 건물을 리모델링해 관광객들이 찾아오고, 마을주민들도 사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 조성키로 뜻을 모았다. 그렇게 재탄생한 것이 질그랭이 거점센터다. ‘질그랭이’는 ‘지긋이’라는 뜻의 제주어다. 마을주민에게는 함께 쉬고 채워가는 마을사랑방의 역할을, 방문객들에겐 편안하고 오래 머물고 쉬면서 다시 찾아오는 지역명소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지은 이름이다.

세화마을협동조합이 운영하는 질그랭이 거점센터 전경. 세화마을협동조합 제공

주민들은 마을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2019년 10월 마을공동체 법인인 ‘세화마을협동조합’도 결성했다. 당시 참여한 주민 수는 477명. 마을협동조합 가운데 전국 최대 규모다. 질그랭이 거점센터 내 카페 이름인 ‘477+’도 조합원 수 477명과 추가로 가입할 주민을 상징하는 ‘플러스(+)’를 조합해 만들었다. 현재 조합원은 494명으로 늘었다.

세화마을협동조합은 단기적으로 주민 일자리와 공동소득 창출을 목표로 마을경제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장기적으로는 주민복지, 교육, 마을 환경개선 등 세화리 마을 전체 분야를 통합적으로 관리하는 역할을 맡을 계획이다.

조합은 현재 질그랭이 거점센터 내 카페에서 이 지역의 대표 농산물인 구좌당근을 재료로 한 주스와 케이크, 친환경용품 등을 관광객과 도내 카페 등을 대상으로 판매하고 있다. 또 관광객과 워케이션 이용객이 이용할 수 있는 숙박시설인 ‘세화밖거리’도 운영 중이다. 관광객 등에게 세화 야밤투어, 해녀투어, 다랑쉬 웰니스 투어, 노르딕워킹, 세화마을 한 주 살기 등 다양한 체험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구좌주민여행사’도 코로나19 이후 활성화되고 있다. 이들 프로그램의 특징은 마을주민들이 운영자로 직접 참여하고, 마을 자연자원 등을 최대한 활용하는 데 있다. 예를 들어 해녀투어는 마을 해녀와 함께 해산물로 요리를 하거나 해녀박물관 등을 둘러볼 수 있도록 구성돼 있다. 다랑쉬 투어 참가자는 자연환경해설사 자격증을 취득한 주민과 함께 오름트레킹 등을 즐길 수 있다.

세화마을협동조합은 사업 첫해인 2020년 코로나19 사태 영향으로 1억 원의 적자를 봤다. 하지만 2021년부터 흑자로 돌아섰고, 워케이션 사업의 성공으로 매출이 급성장했다. 질그랭이 거점센터 방문객 수는 2020년 6,000명에서 지난해 6만여 명으로 10배나 늘었다. 카페와 숙박, 여행사 등의 매출도 3,720만 원에서 3억3,000만 원으로 껑충 뛰는 성과를 거뒀다. 또 워케이션 사업 등으로 관광객들이 몰리면서 마을 내 음식점, 숙박업소, 상가 등 지역 상권도 활기를 띠고 있다.


마을이 바뀌자, 주민도 늘었다

세화마을협동조합 구좌주민여행사가 운영하는 해녀투어 프로그램. 세화마을협동조합 제공

세화리 인구는 2013년 1,955명에서 올해 6월 2,271명으로, 10년 사이 16%나 증가했다. 전국은 물론 제주지역 내에서도 대부분의 농어촌 마을주민 수가 줄어드는 것을 감안할 때 보기 드문 현상이다. 또한 세화리 전체 주민 중 40대 이하 인구가 약 40%나 되는 등 경제활동인구 비중도 큰 것으로 파악됐다.

제주시 구좌읍 세화리 인구수 현황과 마을 지도. 그래픽=강준구 기자

세화마을 주민 수가 늘어난 시기는 제주 전역에서 이주열풍이 한창이었던 2016년 이후부터다. 당시 제주지역에선 이주민을 상대할 때 지역 특유의 ‘텃세’가 있어 이주민과 원주민 간 갈등을 빚는 등 정착 과정에 애를 먹었다. 하지만 세화리의 경우 마을사업 추진 과정에서 지역 상권이 살아나 일자리가 늘고, 이주민들을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조성되며 진입장벽이 상대적으로 낮았던 점이 인구 유입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이주민 출신인 양군모 세화리 사무장은 “2년 전 마을사업 때문에 출장을 가게 돼 아내 혼자 둘째를 출산했는데, 당시 이런 사정을 들은 마을주민 10여 명이 저마다 미역국을 끓여 주고 갔다”며 “처음 마을에 왔을 때는 주민들과 어색한 부분도 있었지만, 금방 마음을 열어주면서 지금까지 크고 작은 도움을 많이 받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5월 개장한 마을 주도형 플리마켓인 ‘구좌로 모모장' 전경. 세화마을협동조합 제공

원주민과 이주민 간 크고 작은 갈등이 발생하고 있는 다른 마을들과 달리 세화리에서는 이주민들의 요구와 의견을 마을사업에 적극 반영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업이 지난 5월 개장한 플리마켓(벼룩시장)인 ‘구좌로 모모장’이다. 이주민들의 플리마켓 운영 제안을 마을이장이 받아들여 장소 제공 등의 지원을 약속하면서 일사천리로 문을 열게 됐다. 부 이장은 “이주민들은 다양한 경험과 실력을 갖고 있어 그동안 추진해 왔던 다양한 마을사업에서 역할이 컸고, 도움도 많이 받았다”며 “마을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원주민과 이주민 모두 힘을 모으고 함께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제주= 김영헌 기자 taml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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