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훈 칼럼] ‘前 정부 탓’의 유효 기간
‘비정상의 정상화’에
전임자를 소환하는 순간
진영 이슈로 변질해
정치 싸움이 돼버린다…
‘죽은 문재인’과
싸울 이유가 없다
문재인 정권의 ‘남 탓’ 타령은 유별났다. 불리한 일이 생길 때마다 남 핑계 대며 자기 합리화로 5년을 보냈다. 경제 악화는 미·중 분쟁 때문이고 서민 경제 고통은 재벌 횡포가 문제라 했다. 소득 주도 성장을 하겠다며 고용 참사를 빚자 인구 구조 탓, 통계 탓이며 야당 탓, 언론 탓, 심지어 애꿎은 날씨 탓까지 들이댔다. 코로나가 터지자 이번엔 바이러스 핑계를 대며 경제 침체의 책임을 비켜 가려 했다.
그중 심했던 것이 ‘보수 정권 탓’이었다. 성장률 추락도, 민생 악화도,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정책 적폐 탓으로 돌렸다. 수해는 4대강 사업 탓, ‘미친 집값’은 규제 철폐 탓이라 했고, 20대의 국정 지지도가 낮은 것마저 “보수 정부의 잘못된 교육”을 탓했다. 오류를 지적받으면 “박근혜 때보단 낫다”거나 “이명박 시절로 돌아가자는 거냐”며 어깃장으로 받아쳤다. 정책 실패를 진영 논리로 비틀어 정치 싸움판을 만드는 게 특기였다.
윤석열 정부의 국정 모토는 ‘비정상의 정상화’다. 문 정부가 망쳐놓은 국정 왜곡을 바로잡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한·미·일 협력 복원, 대북 원칙론, 소득 주도 성장 삭제, 방만 재정 중단, 탈원전 폐기, 부동산 정책 전환, 민노총 개혁 등이 다 그런 것들이다. 문 정부가 이상한 방향으로 몰아간 국가 진로를 정상 궤도로 복원시키라는 게 지난 대선의 시대 정신이었다. 윤 정부가 당연히 해야 할 책무들이다.
윤 정부는 전임자가 쌓아놓은 실정(失政)의 잔해 위에서 출발했다. 온갖 곳에 박힌 정책 왜곡의 대못을 빼내기 위해 과거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이를 통해 국정 동력을 얻는 것은 불가피한 일일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지나쳐 ‘무조건 뒤집기’로 비춰진다면 문 정권과 똑같은 실패의 함정에 빠져들 수 있다. 안타깝게도 지금 윤 정부가 그런 모습을 보이고 있다.
윤 정부의 ‘전(前) 정권 탓’은 문 정부에 뒤지지 않는다. 국정 곳곳에서 전임 정권을 불러내 ‘반(反)문재인’을 정책 추진의 에너지로 삼고 있다. 난방비 폭탄에 서민들이 아우성치자 산업부 장관은 문 정부 시절 요금 동결을 비난했고, 전세 사기가 터지자 국토부 장관은 문 정권의 임대차 3법을 거론했다. 북의 미사일 도발은 “문 정부의 외교 참사 탓”이고, “지난 정부가 국민 세금을 영끌해” 경제 운용이 힘들어졌다고 했다. 여당에선 “우린 문 정부의 폭탄 제거반”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윤 대통령부터 전임자 소환에 앞장섰다. 정권 초 장관 후보자를 둘러싼 논란이 빚어지자 “전 정권 장관들 중에 이렇게 훌륭한 사람 봤느냐”고 반문했고, 검찰 출신이 대거 중용된다는 지적이 나오자 “과거엔 민변 출신이 아주 도배하지 않았냐”고 했다. ‘보복 수사’ 논란에는 “민주당 정부 때는 안 했나”라고 반박하고, 북 무인기의 방공망 침투엔 “문 정부에서 훈련이 전무(全無)했다”는 이유를 들었다. 탈원전을 폐기하면서 “지난 5년 동안 바보 같은 짓을 했다”고 했고, 감세를 추진하면서 “지난 정부 때 징벌 과세를 좀 과도하게 했다”고 언급했다.
말 자체는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문 정부의 친북·친중 편향이 외교·안보를 흔들었고, 돈 푸는 세금 주도 성장은 경제 체질을 악화시켰다. 반시장적 부동산 규제, 에너지 포퓰리즘, 자해적 탈원전이 지금까지 국정에 부담을 주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정권이 교체된 지 이미 1년 3개월이 넘었다. 당연히 해야 할 ‘비정상의 정상화’에 앞 정부를 끌어들이는 순간 진영 이슈로 변질될 수 있다. 국정 왜곡을 바로잡는 정책 문제를 정치적 공방의 대상으로 내모는 전략적 미스다.
LH 아파트 철근 누락 사태에 윤 대통령은 또 전임자를 불러냈다. 부실한 설계·시공·감리가 “모두 우리 정부 출범 전에 이뤄졌다”며 문 정부에 책임을 돌렸다. 이것은 100% 정확한 말도 아니다. 문 정부 시절의 부실 공사만 적발된 것은 국토부가 ‘2017년 이후’ 준공된 무량판 주차장을 대상으로 조사했기 때문이다. 역대 어느 정권이건 건설 비리는 늘 있어 왔고, 문 정부가 특별히 더 원인을 제공한 것도 아닐 것이다. 대통령의 ‘건설 카르텔 해체’ 의지는 박수받을 만하지만 굳이 전 정권 얘기를 꺼내 정치 공방화할 필요는 없었다.
2000년 집권한 미국 부시 정권은 ‘ABC(Anything But Clinton·클린턴만 빼고 다) 정부’로 불렸다. 전임 클린턴 때 정책은 무조건 뒤집었다는 뜻이었다. 윤 정부도 그렇게 비춰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만약 윤 정부가 ‘ABM(Anything But Moon·문재인 빼고 다)’의 꼬리표를 달게 된다면 그것은 실패로 가는 길이다.
과거와 다투는 대신 윤 정부 자신의 주제를 갖고 ‘미래’를 말했으면 한다. ‘죽은 문재인’과 싸울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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