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자 다산·정치인 처칠·화가 모네, 이들 모두 정원을 사랑했네
정원 가꾸기 즐긴 명사 12인 탐색
인생정원
성종상 지음|스노우폭스북스|384쪽|1만9500원
“집이야 가난해도 꽃은 더욱 많다네. 먹을 수 있어야만 실용이 아니라, 정신을 기쁘게 해서 뜻을 길러주는 것도 가치가 있지.”(다산 정약용)
실학자 정약용(1762~1836)은 알고 보면 보기 드문 낭만주의자였다. 지금의 명동인 서울 명례방에 살던 30대 시절 집 마당 한쪽에 대나무 난간을 둘러 작은 정원을 만들었다. 18종의 국화와 부용화, 수선화를 비롯 석류·매화 등 13그루의 나무가 있는 이곳에서 선비 모임을 열었다. 가을밤엔 흰 벽 앞에 국화를 놓고 촛불을 비춰 벽에 어리는 국화 그림자를 감상했고, 여름철 새벽 연못에 배를 띄워 일출과 함께 연꽃 봉오리가 터지며 내는 소리를 즐겼다고 한다.
가꾸는 데 품도 들고 취향이 지극히 반영되는 정원은 집 주인의 내밀한 취향을 잘 보여주는 공간. 이 책에서 다루는 인물은 정원 가꾸기를 즐겼던 동서양 명사 12인이다.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이자 조경가인 저자가 정원을 통해 이들의 인간적 면모에 접근한다. 동시에 저자가 찍은 세계 곳곳의 정원 사진들이 무더위 속 마음까지 시원하게 만들어준다. 기분 전환 삼아 읽기에도 좋은 책.
저자가 선별한 명사는 다산과 헤르만 헤세,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퇴계 이황, 토머스 제퍼슨, 찰스 3세, 윈스턴 처칠, 정조대왕, 클로드 모네, 소쇄옹 양산보, 고산 윤선도, 안평대군이다. 이들은 집에 돌아오면 ‘정원사’가 됐다. 거처를 옮길 때마다, 삶의 위기를 맞았을 때도 정원 사랑은 계속된다. 정원은 자연과 하나 돼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공간이자 창작의 원천, 실용의 공간. 프랑스 지베르니에 그림 같은 정원을 만들고 이를 작품 소재로 쓴 모네(1840~1926)는 이렇게까지 말했다. “가진 돈 전부를 정원에다 쏟아부었지만 그래도 황홀하기만 하다.” 헤세(1877~1962)도 평생을 전쟁과 권력의 폭력으로부터 피해 다니면서도 가는 곳마다 정원을 가꿨다. 그는 “쉽고 편안하게 사는 법은 알지 못하지만 창문 앞의 정원과 풍경을 두고 즐기는 아름다운 삶은 애써 누리려 했노라”라고 했다. 거주 유형의 60%가 아파트인, 주거 환경이 획일화된 요즘 현실에서 정원 이야기는 낭만적이면서도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정원에선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아들로서의 면모가 두드러진다. 가령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처칠(1874~1965)의 정원엔 가족에 대한 사랑이 살아있다. 그가 어릴 적 받지 못한 부모의 사랑을 구현했다는 설명이다. 어린 시절 반항적 기질에 언어 장애가 있어 아버지에게 ‘전혀 쓸모없는 놈’으로 낙인찍히고 바람둥이 어머니에게도 사랑받지 못했다는 그는, 차트웰 저택 정원에 막내딸을 위한 놀이용 벽돌집을 직접 지었고, 고목에 설치된 그네에는 아이들의 애칭인 ‘토끼(Rabbit)’ ‘쥐(Mouse)’를 단정한 글씨로 새겼다. 장미 정원은 아내를 위해 만든 것. 찰스 3세 영국 국왕도 유명한 정원가다. 2001년 ‘첼시 플라워쇼’에 이슬람식 정원을 출품, 은메달을 받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어릴 적 공식 일정으로 바빴던 어머니 고(故) 엘리자베스 2세 여왕 대신 할머니와 정원 일을 하며 보냈던 추억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정원은 당시 정치 환경에서 생존을 위한 혹은 고립을 택하는 상징적인 장소이기도 했다. 정조(1752~1800)는 조선 최고의 식목왕으로 평가될 만큼 많은 꽃과 나무를 심었다. 죄인 사도세자의 아들로 왕위에 오르기까지 어려움을 겪었던 그는 창덕궁 후원을 신하와 어울리는 장소로 쓰며 왕권을 다지고 통합을 이루고자 했다. 조선시대 문인 양산보(1503~1557)는 스승 조광조 문하에서 글공부를 하다 기묘사화로 스승이 하루아침에 몰락하는 것을 본 뒤 벼슬길을 접고 다시는 세상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그의 도가적 꿈과 유가적 바람이 담긴 정원 소쇄원은 한국 최고의 선비 정원으로 꼽힌다.
정원들을 구경하다보면, 해외 정원은 대개 잘 보존되고 가꿔져 명소가 된 반면, 국내 명사의 정원은 방치되거나 훼손된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 최고의 정원가’로 꼽히는 문인 윤선도(1587~1671)가 살던 보길도 낙서재는 2011년 복원됐지만, 그의 정원은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저자는 “복원이라기보다는 정원 유구를 훼손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지적한다. 이제 고산의 정원은 작품 속에만 남았다. 그는 달 밝은 밤이면 해남에 자신이 조성한 수정동 정원의 수정암 아래 앉아 눈앞에 쏟아지는 우레 같은 폭포 소리를 들으며 달을 감상했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대목. ‘어쩌다 이런 호사스러운 극치를 즐기게 되었는고/ 은거하는 나 혼자 웃다가 문득 술잔을 드네.’(‘우후희부 취병비폭 雨後戲賦 翠屛飛瀑’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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