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청·알바 근로자 70~80% 갑질 경험, 피해자가 가해자 되기도

황건강 2023. 8. 5. 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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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인에 대한 만인의 갑질 공화국
“가끔씩 고객들에게 들었던 말이 내 입에서 나와 놀랍니다.”

서울의 한 여행사에서 고객 상담 업무를 맡고 있는 직장인 권모씨(39)는 갑질 피해의 가장 큰 후유증으로 전염성을 꼽았다. 권씨는 고객들의 불만을 달래는 게 주된 업무인 까닭에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갑질을 경험하곤 했다. 문제는 이렇게 경험한 갑질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 불쑥 튀어나온다는 점이다. 당했던 대로 행동하려는 유혹을 뿌리치기가 쉽지 않은 셈이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갑질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기 쉽다는 건 수치로도 나타난다. 불평등과 민주주의 연구센터가 지난 2018년 진행한 조사에 따르면, 갑질을 당한 빈도가 많은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에게 갑질한 경험도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갑질을 당해본 적 없는 사람의 경우 19%만 다른 사람에게 갑질한 경험이 있다고 응답한 반면, 갑질에 자주 노출되는 사람 가운데 다른 사람에게 한 번 이상 갑질한 적이 있다는 응답은 57%를 기록한 것이다. 갑질을 당한 사람이 지위나 위치가 바뀌면 얼마든지 갑질 가해자가 될 수 있다 얘기다.

갑질이 개인적 문제가 아닌 사회적 문제라는 건 하청업체의 갑질 피해 경험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상대적으로 ‘을’의 위치에 놓이기 쉬운 하청업체에서 갑질을 경험했다는 응답이 급증하는 것이다. 시민단체인 직장갑질119가 최근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최근 1년간 직장 내 갑질을 경험했다고 응답한 비중은 33.3%였다. 그러나 원청과 하청업체 관계에서 원청회사의 갑질을 경험했다는 응답은 70.2%로 껑충 뛴다.

이 보다 더 취약한 위치에 놓인 시간제 근로자(아르바이트)들은 어떨까. 구인·구직 플랫폼인 알바천국이 시간제근로자 165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손님으로부터 갑질을 경험했다는 응답은 79.2%에 달한다. 노동 시장에서 열악한 위치에 놓인 사람일수록 갑질에 더 빈번하게 노출된다는 얘기다.

갑질에 취약할 수록 뾰족한 대응 방안이 없다는 것도 문제다. 회사 안에서의 갑질은 직장내 괴롭힘 방지법 등으로 보호받는 반면, 하청업체나 시간제 근로자는 원청업체와 고객에게 현실적인 대응방안이 없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이다. 예컨대 하청업체 직원은 현행법 상 원청회사의 갑질을 신고할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게 노동계의 중론이다. 시간제근로자도 마찬가지다. 손님들의 갑질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묻는 설문조사에 1위를 차지한 건 매뉴얼만 반복한다는 응답(41.5%)였고 손님에게 일단 사과한다는 응답(34.6%)이 뒤를 이었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갑질에 열악한 위치의 놓인 피해자를 보호할 법적인 조치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장기적으로는 갑을 관계와 상관없이 갑질이 사라지는 게 궁극적인 해법이겠지만, 당장은 법적인 보호 방안을 강화해야 한다는 얘기다. 신의수 직업상담협회 이사는 “갑질 사각지대에 놓인 취약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파견법과 근로기준법 등을 개정해 방어책을 마련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조언했다.

황건강 기자 hwang.kunk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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