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서 활동하다 온 임군홍, 최승희 달력 만들어 옥고 치러

2023. 8. 5.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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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의 예술가의 한끼
아들은 세 살 때 헤어진 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다. 아들이 보는 건 아버지가 남겨 놓은 그림들이다. 소년이었다가 청년이 된 아들, 이제는 막 노경으로 접어들려는 아들은 같은 그림을 여전히 보고 있다. 가만히 그림을 들여다보노라면 그림이 아버지의 얼굴이 되어, 아버지의 목소리가 되어 말을 걸어온다. 아들은 임덕진(1948~)이고 아버지는 임군홍(1912~1979)이다.

임군홍은 한국미술사에서 낯선 이름이다. 6·25 전쟁이 났을 때, 그는 북으로 갔다. 그리고 우리는 그를 잊었다. 해방 전에 중국에서 활동했기에 더 낯설 수도 있다. 한국 근대미술 공간은 현해탄을 오가며 형성되었다. 중국 대륙과는 인연이 느슨하다. 중국에서 있었던 임군홍의 활동을 기억하는 이가 그만큼 드물 수밖에 없다. 만주에서 체류했다는 화가들은 가끔 보인다. 한묵(1914~2016), 강신석(1916~1994)이 그랬다. 그렇지만 그들이 만주에서 그려서 남긴 작품들은 거의 전하지 않는다. 임군홍은 한반도와 가까운 만주가 아니라 중국 내륙의 깊은 곳 한커우(漢口·우한의 일부)까지 가서 활동했다. 우한은 상하이에서 양쯔강을 한참 거슬러 올라간 도시다. 임군홍은 한커우와 베이징을 오가며 그림을 그렸고 130점이 넘는 유화 작품을 비롯해 수많은 작품들을 고스란히 서울 명륜동 자택에 남겼다. 그가 남긴 작품들은 한국 근대미술사를 한반도와 일본에서 중국대륙까지 넓혀주는 귀한 자산이다.

한국미술 중국대륙까지 넓힌 귀한 자산

임군홍. [사진 임군홍 유족]
임군홍은 서울 인현동에서 태어났다. 유복한 집안이었으나 그가 주교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할 무렵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상급학교에 진학하는 대신 치과기공사가 되었다. 그의 나이 16세였다. 기공사 일을 하는 바람에 나중에 부인이 되는 홍우순을 만났다. 그녀는 치과병원의 간호사였다.

임군홍은 화가가 되고 싶었다. 당시 화가가 되려면 미술학교가 있는 일본으로 가야 했다. 임군홍은 서울에서 생업에 매진하는 한편 거의 독학에 가깝게 미술을 공부했다. 그의 나이 스무 살이 되던 1931년,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 ‘봄의 스케치’가 입선했다. 자신감이 생겼다. 1936년은 바빴다. 그해 홍우순과 결혼했다. 5월에는 제15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여인좌상’이 입선했다. 6월에는 엄도만, 송정규, 최규만과 함께 녹과회를 결성하여 유치진이 경영하던 플라타느다방에서 창립전을 가졌다. 8월에는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손기정이 금메달을 땄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들뜬 한 해였다.

1937년 제16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모델’과 ‘소녀상’이 입선되었는데, 작품 속의 주인공은 다름아닌 새색시 홍우순이었다. ‘모델’은 상반신 누드상이다. ‘소녀상’은 단순하고 대담한 속필로 완성한 그림인데 임군홍이 주교공립보통학교를 다닐 때 교사였던 김종태(1906~1935)의 속필이 재현된 듯하다. 이듬해 임군홍은 엄도만과 함께 ‘예림스튜디오’라는 디자인 회사를 차린다. 설계 제작, 공예 도안, 간판, 무대장치에 초상화까지 다 제작 가능한 회사였다.

왼쪽부터 엄도만, 이종무, 한홍택, 신홍휴, 박병수, 임군홍. 1946년 동화화랑에서. [사진 임군홍 유족]
1939년 임군홍은 혼자서 만주, 톈진, 베이징을 여행했다. 베이징에서 여관을 옮겨가며 매일 그림을 그렸다. 톈진에 살면 돈벌이가 좋을 거라는 내용으로 서울의 부인에게 엽서를 쓰기도 한다. 돌아오는 길에 신징(현재의 창춘)에서 김혜일, 임군홍 2인전을 열었다.

중국에서의 삶에 자신감을 느낀 임군홍은 1940년에 아예 부인과 함께 중국 한커우로 이주했다. 절친인 화가 엄도만(1915~1971)과 함께 한커우의 최고 번화가 화루가(花樓街)에 인테리어, 광고, 사진인화를 취급하는 미술광고사를 열었다. 사업은 대성공이었다. 돈이 들어오자 고급물감과 캔버스를 샀다. 예화조상방대(藝華照相方大, 照相方大는 인화확대의 뜻)라는 현수막이 걸린 골목은 물론이고 한커우 시장 골목의 정육점 등 주변 풍경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나갔다. 주말이면 이젤을 들고 1134㎞나 떨어진 베이징으로 갔다. 교통이 불편한 시절이었음에도 그 먼 거리를 예사로 오갈 만큼 임군홍은 창작에 열정적이었다. 하루의 시간과 계절에 따라 느낌이 바뀌는 자금성, 천단 기년전을 반복적으로 그렸다. 임군홍과 비슷한 시기에 베이징의 자금성을 그린 화가로 우메하라 류자부로(梅原龍三郞 1888~1986)가 있다. 임군홍은 독학자답게 여러 개의 화풍을 대상에 따라 달리 구사했는데, 자금성 그림을 보면 두 사람은 화풍이 비슷하다. 임군홍이 남긴 유품으로 우메하라가 유화로 그린 장미도(1940년작)를 석판화로 제작한 판화가 있다. 임군홍은 우메하라를 무척 좋아했던 듯하다.

임군홍이 중국에서 교유한 일본인 화가로 야자키 치요지(矢崎千代二 1872~1947)가 있다. 야자키는 만주를 거쳐 1943년부터 베이징에 거주하며 북평(北平)예술전문학교에서 후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임군홍과 야자키, 이 두 사람은 나이, 민족을 뛰어넘어 예술적 동지가 되었다. 야자키는 임군홍을 그린 파스텔 초상화를 남겼다.

아들 임덕진, 돈 생기면 부친 그림 ‘수복’

임군홍의 1950년 유화 ‘가족’. [사진 예화랑]
해방이 되었다. 임군홍은 1946년 봄에 베이징, 북한을 거쳐 서울로 왔다. 소련군의 횡포를 피하려 부인은 얼굴에 숯검정을 묻혔다.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인쇄소와 광고미술사를 열었다. 10월에는 신홍휴, 엄도만, 한홍택, 이종무, 박병수와 함께 ‘양화 6인전’을 동화화랑에서 열었다. 처음에는 우보당이었다가 나중에 고려광고사가 된 광고미술사는 서울역과 지방역 대합실의 광고를 도맡았다. 꽤 큰돈이 들어왔다. 호사다마라고 할까. 불행이 닥쳤다. 임군홍은 1948년도 운수부(교통부)의 신년 달력 제작을 맡았다. 여기에 월북한 무용가 최승희의 사진을 활용한 그림이 들어갔는데 이게 이적행위로 간주되었다. 미군정청 군정장관이던 윌리엄 프리시 딘의 특별사면 지시에 의해 풀려나긴 했지만 임군홍은 몇 달간 옥고를 치러야만 했다. 자신을 바라다보는 주위의 시선도 냉랭해졌다.

6·25전쟁이 났다. 9·28 서울수복을 앞두고 패퇴하는 인민군을 따라 많은 사람들이 납북되었다. 임군홍은 이 무렵 ‘가족’을 그리고 있었다. 부인과 아이들, 명륜동 집 마당에 피어있는 백합까지 다 들어간 그림이었다. 명륜동 집은 넓은 마당이 있는 기역자 집이었다. 본채의 동쪽 끝방은 임군홍의 화실이었다. 큰 유리창이 있어 환했다. 철제 스프링 침대가 있어 그림을 그리다 쉬기 좋았다. 마당에는 화단이 있어 나팔꽃이 본채 기와지붕에 늘어뜨린 줄을 타오르며 아침마다 꽃을 피웠다. 남쪽 울타리에는 봄에는 개나리가, 여름에는 수국이 꽃을 피웠다. 동쪽 개울가 담벼락의 감나무에는 가을마다 발갛게 홍시가 달렸다. 감이 채 익기도 전, 그해 9월 물감이 덜 마른 미완성의 캔버스가 이젤에 걸려있는 채로 임군홍은 북으로 끌려가버리고 말았다.

임군홍의 1940년 유화 ‘골목인상’. [사진 예화랑]
전쟁이 끝났다. 주위 사람들은 임군홍의 가족을 외면했다. 부인 홍우순은 남아있던 골동품들을 하나씩 처분하며 가계를 꾸리다가 나중에는 광장시장으로 가서 채소, 과일 장사를 했다. 미술 동료로 광장시장 근처 천일백화점에서 일하던 이완석(1915~1969)이 유일하게 임군홍의 가족에게 아는 체를 해주었다. 명절이 되면 집에 찾아와 아이들에게 용돈도 주었다.

임군홍은 술을 못 마셨다. 남편은 없었지만, 부인은 해마다 포도주를 담갔다. 술이 거의 안 들어간 포도주였다. 아이들이 학교를 졸업하는 날은 북창동 또는 단성사 옆의 중국집을 찾았다. 물만두와 오향장육을 먹으며 중국 시절을 회상했다.

임군홍이 남긴 수많은 그림을 보관하는 일은 힘들었다. 액자와 캔버스를 분리하여 부피를 줄였다. 캔버스와 신문을 차례차례 올려 그림을 보호했다. ‘가족’ 그림에서 홍우순의 품에 안긴 아이가 둘째 임덕진이다. 임덕진은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다니다 광장시장으로 뛰어들어 장사를 했다. 송이버섯으로 큰돈을 벌었다. 돈일 생길 때마다 부친의 그림을 수복했다. 80년이 넘은 그림들이건만 금방 붓을 뗀 것처럼 생생하게 보이는 건 수복의 덕이다. 임군홍의 명륜동 옛집에는 감나무 한 그루가 남아있다. 가만히 놔두어도 올가을에 틀림없이 발갛게 홍시가 달릴 것이다.

황인 미술평론가.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전시기획과 공학과 미술을 융합하는 학제 간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 현대화랑에서 일하면서 지금은 거의 작고한 대표적 화가들을 많이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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