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로세움 닮은 소극장, 조선 공연·관람 문화 판을 바꾸다
[근대 문화의 기록장 ‘종로 모던’] 공연 근대화의 요람
질문에 답부터 먼저 하면, 정답은 협률사(協律社)다. 1902년 8월 15일 『황성신문』은 “희대를 봉상시 내에 설치하고, 한성 내 선가선무(노래 잘 하고 춤 잘 추는)한 여령(女伶, 재주꾼)을 뽑아 가르친다”는 기사를 실었다. 협률사 설치에 관한 첫 소식이다. 희대(戲臺)는 극장을 뜻하는 중국식 명칭이다. 봉상시(奉常寺)는 당시 궁궐의 제사와 의식을 관장하는 궁내부 소속기관으로, 지금의 서울 종로 새문안교회 인근에 있었다.
최남선 “런던 로열극장 같은 국립극장”
희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전속 연희단체의 이름을 따 협률사로 불렸다. 고종황제의 즉위 40주년을 기념하는 경축 행사를 목적으로 설립됐다. 육당 최남선은 「조선상식문답속편」에서 각국 외교사절 등 “귀빈 접대를 위해 여러 가지 신식설비를 급히 진행할 때, 봉상시의 일부 터에 둥근 벽돌로 로마의 콜로세움을 닮은 소극장을 건설했다”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춤과 노래에 재능 있는 재주꾼들을 뽑아 공연을 연습하게 했다”고 적었다. 이렇게 뽑아 결성된 전속 단체가 협률사요, 나중에 이게 극장 이름이 됐다.
협률사는 종로 도심에 들어선 한국 최초의 실내극장이다. 이 극장이 들어서면서 한국의 근대 공연사가 시작됐다. 다시 최남선의 평가다. “협률사는 규모는 비록 작지만 무대와 층단식 삼방 관람석, 인막, 준비실을 설비한 조선 최초의 극장”이자 “런던의 로열극장, 빈의 왕립극장에 비견되는 유일한 국립극장이었다.”
그 이전 우리나라에는 극장이란 게 없었단 말인가. 정확히 말해 ‘실내극장’은 없었다. 협률사의 등장으로 한국은 본격적인 실내극장 시대로 진입하는데, 그것은 곧 극장의 근대화라는 말로 통한다. 무대와 객석이 엄격히 분리되면서 공연하는 사람과 관객의 만남 방식이 바뀌었다. 작품도 변화된 무대에 맞게 ‘새로’ 만들어야 했다. 야간 공연이 이뤄지면서 없던 밤 문화도 생겼다.
그러면 옛날에는 공연을 어디에서 했을까. 조선시대에 판소리와 농악, 줄타기 등 민간 연희는 정자나 누각, 마당 등 야외 공간에서 주로 공연했다. 중세 유럽의 이동식 무대 같은 산대(山臺)도 있었으나, 공연을 상설로 할 수 있는 실내 무대는 발달하지 않았다. 우리 공연예술의 후진성을 지적하는 게 아니다. 그게 우리 전통 공연의 특징이다.
왕실이라고 사정이 다를 게 없었다. 진연(進宴) 등 크고 작은 잔치를 할 때는 궁궐 내에 임시 가설무대를 만들어 사용했다. 여기서 기녀와 무동의 정재(呈才, 대궐 안의 잔치 때 벌이던 춤과 노래)가 펼쳐졌다. 한가운데에 공연자의 무대 공간을 확보하고, 임금의 좌우로 객석을 배치해 활용했다.
종로 한복판에 파고든 실내극장은 과거로부터 전해오던 우리나라의 이런 공연 문화를 일거에 바꾸었다. 개화기 근대로 향해 가는 우리 사회에 엄청난 변화였다. 우선 당시 도시 미관의 측면에서 실내와 야외의 구분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었다. 당시 한성부는 ‘아현동의 무동연희장’ 등 가설극장이 사람들의 통행을 방해하고 거리의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도시 내 활동을 금지했다. 실내극장은 도시화 과정의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좋은 대안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한국 최초의 실내극장’ 협률사의 활동은 오래가지 못했다. 극장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급격한 사회 변화를 당시 황실은 감당하지 못했다. 황실은 협률사가 설립 당시의 초심을 잃고, 창기(倡妓)들이 펼치는 풍기 문란의 온상으로 변질했다는 이유를 들어 설치 4년 만인 1906년 폐지한다. 2년 뒤인 1908년 협률사의 명맥을 이어 재단장하고 출발한 극장이 원각사(圓覺社)다. 이인직은 경시청으로부터 연극장 개설을 허가받아 원각사라는 이름으로 극장 문을 다시 열었다. 개관작으로 자신이 지은 신소설 『은세계』를 신극으로 만들어 선보였다. 『은세계』의 공연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신극뿐만 아니라 다양한 연예 영업을 겸했고, 매일 7시부터 공연을 시작했다. 나름 성황을 이루어 “매일 수입이 백여 환에 달했다”고 한다.
“사동 연흥사의 연극 밤마다 인산인해”
원각사의 레퍼토리는 대부분 당시 유행하던 〈춘향가〉와 〈심청가〉, 〈흥부가〉, 〈화용도〉 등 판소리였다. 그런데 실내극장으로 오면서 공연 형식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옛날 마당이나 누각, 정자 등 야외에서 소리꾼과 고수 둘이 하던 판소리는 이제 배역을 나눠 부르는 분창(分唱)으로 바뀌었다. 창극의 시발점이다. 관기(官妓)의 가무와 광대의 재담도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관립극장의 위탁 경영이라는 운영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원각사는 개관 1년 뒤에 문을 닫았고, 그 후 명맥만 유지하다 1914년 화재로 소실됐다.
이 무렵 종로를 근거지로 활동한 극장은 원각사만이 아니었다. 비슷한 시기 한국인이 운영하던 극장 여러 개가 지금의 인사동 일대에 산재해 활동했다. 연흥사(1907)와 단성사(1907), 장안사(1908) 등이다. 영화 상영관으로서 앞으로 한국영화사에 중요한 역할을 할 단성사 외에 연흥사와 장안사에 관한 상세한 기록은 별로 없다. 규모 등은 모르고, 당시의 신문 기사를 통해 무엇 무엇을 했다는 정도만 알 수 있다.
현재 종로구청 자리에 있던 연흥사는 한국 최초의 신파극단인 혁신단의 〈육혈포강도〉 등 신파극 전문극장으로 명성을 떨쳤다. 교동초등학교 근처에 있던 장안사는 1908년 경성고아원 건립 기금 마련을 위해 관기 100명을 동원한 ‘관기자선연주회’를 개최하는 등 자선공연을 많이 했다. 특이하게 〈삼국지〉 등 청나라의 연희도 선보였다.
단성사와 우미관(1912)이 그랬듯이, 새 예술로 부상한 영화(활동사진)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극장 대부분은 활동사진과 신파극, 각종 연희를 섞어서 운영했다. 실내극장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당시의 상황에서 다목적극장은 불가피한 전략이었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대정관(1912) 등 일본인이 운영하는 극장이 사대문 안에 우후죽순처럼 들어서기 시작했는데, 주목적은 영화 상영이었다.
실내극장 중심으로 공연 문화가 정착하면서 신문도 점차 관심을 가지고 ‘공연 정황’을 알리기 시작했다. 1912년 4월 2일 『매일신보』는 “사동 연흥사에서 흥행하는 혁신단 연극은 날이 갈수록 밤마다 인산인해를 이룬다”며 “친목회의 경비를 보조할 목적으로 장차 연주회를 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같은 달 12일 자에는 “원각사에서 공연하던 문수성의 신연극이 기생 연주회로 인해 며칠간 쉰다”는 소식을 실었다.
오늘날 실내극장 없는 공연은 상상할 수 없다. 일찍이 실내극장 전통이 없었던 우리나라는 구한말 어려운 상황에서도 서구식 실내극장을 수용하여 공연 근대화의 초석을 놓았다. 그 시발점이 된 종로는 소극장의 산실 ‘대학로’와 세종문화회관 등을 품고 여전히 한국 공연 문화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종로구청·종로문화재단·중앙SUNDAY 공동기획
정재왈 예술경영가·서울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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