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혈연·입양 너머의 공동체

이후남 2023. 8. 5.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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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각본
가족각본
김지혜 지음
창비

국어사전에서 며느리와 사위는 각각 ‘아들의 아내’ ‘딸의 남편’으로 정의된다. 대칭적 개념이다.

한데 최신의 가족은 어떨지 몰라도, 전통적 가족 내 역할은 대칭적이지 않다. 며느리는 시부모에 효도하고, 집안을 화목하게 이끌고, 친척들을 섬기고, 제사를 받들고, 손님 대접에 정성을 다하고, 바느질·길쌈·누에치기와 음식 마련에 부지런히 힘쓰고, 살림살이에 근검절약하는 등 해야 할 도리가 한둘이 아니다. 모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며느리’ 항목에 나오는 내용이다.

비록 전통적인 가족 내 지위는 낮지만 “기대되는 역할만 본다면, 며느리를 맞는다는 건 전문경영인을 모셔오는 일과 같은 수준”의 큰일이라는 게 이 책 『가족각본』의 묘사다. 그럼 이런 역할을 남자는 하면 안 될까. 저자가 이렇게 되묻는 건, 여러 해 전 동성 로맨스를 그린 유명 작가의 드라마를 비난하거나 차별금지법 제정에 반대하는 시위에 등장한 구호가 “며느리가 남자라니”라서다.

프랑스가 2013년 동성결혼을 합법화한 직후 사람들이 모여 축하하는 모습. [AFP=연합뉴스]
이 책은 스테디셀러가 된 『선량한 차별주의자』 저자이자, 차별·인권·소수자에 대한 연구를 해온 강릉원주대 교수의 신작. 성별에 따른 역할 구분을 비롯해 가족이 기능해온 방식을 여러 가지 초점과 접근법을 통해 비판적으로 살핀다. 결혼과 출산을 한데 묶는 것도 그중 하나. 저자는 한편으로 혼외출생자를 차별하고, 다른 한편으로 과거 한센인들에게 그랬듯이 ‘출산의 자격’을 국가가 강제한 역사도 되짚는다.

복지국가를 표방하는 한국이 가족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려는 노력에 인색했다는 지적도 눈길을 끈다. 책에 따르면, 영국 같은 나라가 부양의무를 지는 가족의 범위를 20세기 중반부터 크게 축소한 것과 비교해 한국은 그 범위가 넓은 편. 저자는 기초생활보장급여 등에서 가족의 부양의무를 우선시하는 데 따른 문제점과 함께 부양의무가 계층에 따라 상반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도 지적한다. 속칭 ‘있는’ 사람들은 사회경제적 지위의 세습 가능성을 높일 수 있는 반면 ‘없는’ 사람들은 가족 생활 자체가 어려워 질 수 있다는 것이다.

책 제목의 ‘가족각본’은 가족 구성원에게 맡겨진 역할과 그 작동방식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저자에 따르면 성소수자는 평소 잘 드러나지 않는 이 각본의 실체를 감지하게 하는 등장인물. 그렇다고 문제가 이들에게만 해당되지 않는다. 책에는 어린 자녀를 돌보지 않은 부모가 자녀의 유산 상속에 우선권을 갖거나, 반대로 수십 년 가족처럼 살아온 이성 커플이나 동성 동거인이 권리를 인정받지 못한 경우를 비롯해 ‘가족’이 뭔지 다시 생각하게 하는 사례와 판례가 여럿 나온다.

저자는 가족을 ‘정상/비정상’으로 나누고 가족의 위기·해체를 논하는 대신, 변화하는 가족의 역동성·다양성을 바라보자고 주문한다. 이 책의 뒷부분은 현행 법이 규정한 혼인·혈연·입양 말고도 가족에 준하는 공동체 관계를 인정하는 방법으로 독자의 시선을 이끈다. 프랑스가 1999년 도입한 연대계약이나 올해 초 우리 국회에 발의된 생활동반자법은 법률혼과 달리 상대방 가족과 인척관계는 생기지 않되, 법률혼처럼 부양·협조 의무 등을 규정한다.

‘며느리가 남자라니’ 같은 구호가 나온 배경을 저자는 기존 가족 질서의 변화에 대한 두려움으로도 풀이한다. 한데 세상은 변한다. 단적인 예로 결혼은 줄고 이혼은 늘고 출생률은 급감했다. 새로운 각본이, 혹은 각본을 버리는 일이 필요해 보인다.

참고로 덧붙이면, 가족 구성원에게 전통적으로 기대해온 역할로 여겨지는 것이 모두 전통에서 나온 건 아니다. 일례로 신사임당에게 단골로 붙는 ‘현모양처’는 20세기초 등장해 일제강점기 확산한 용어란다. ‘인구’가 아니라 ‘가족’이 초점인 책이되, 출생률과 인구 문제를 고민해야 하는 이들에게도 참고가 될 내용이 많다.

이후남 기자 hoon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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