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과 주기가 만든 정물화
신준봉 2023. 8. 5. 00:20
가이 대븐포트 지음
박상미 옮김
을유문화사
미술 교과서나 전시 도록에서 ‘정물(靜物)’의 영어 표현 ‘Still life(이 책의 제목, 스틸라이프)’를 만날 때마다 난감하다. 어쨌든 뭔가 살아 있다는 뜻이다. 정작 화폭에는 곧 썩을 운명의 과일 등속이나 애초부터 생명 없는 무정물(無情物), 가령 석고상 같은 것들이 그려진 경우가 대부분인데도 말이다.
책을 번역한 박상미씨에 따르면 정물화는 미술사에서 저평가된 장르였으나 현대에 들어와 가장 실험적인 장르가 됐다. 명맥이 끊긴 적도 없다. 계속해서 화가들의 관심 장르였다. 왜 그랬을까.
미국 작가 대븐포트는 미술사와 자연사, 고대 그리스 문학과 현대의 대중소설, 고대·중세·현대의 시간대 등을 내키는 대로 넘나들며 정물화 이야기를 한다. 선형적인 글쓰기라기보다 “아카이브적, 콜라주적 에세이다.”
쉽지 않지만 건질 것도 많은데, 책의 핵심 주장 중 하나가 정물화가 ‘큰 밝음’, 인간 문명과 연관돼 있다는 것이다. 예측 불가능한 시간 흐름과 천체 운행에 일정한 주기성, 즉 낮과 밤이나 달과 년 같은 단위를 부여하면서 문명이 시작됐고, 음식을 조리해 대접하는 식탁 예절이 싹텄을 텐데, 음식이 차려진 테이블을 그린 정물화가 바로 그런 바탕 위에 있다는 것이다.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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