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의 군사원조 대가는 북한 전략물자

2023. 8. 5.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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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다 하루키의 한국전쟁 전사
와다 하루키의 한국전쟁 전사
와다 하루키 지음
남상구·조윤수 옮김
청아출판사

6·25전쟁이 지난 7월 27일로 정전 70주년을 맞았다. 서구권과 소련·러시아는 한국전쟁, 중국·일본에선 조선전쟁이라고 부르는 전쟁이다.

이 책은 일본에서 1999년 출간된 『조선전쟁(朝鮮戰爭)』 을 바탕으로 2002년 펴낸 개정판 『조선전쟁전사(朝鮮戰爭全史)』를 우리말로 옮겼다. 지은이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도쿄대 명예교수는 그 사이 공개된 소련의 비밀자료까지 검토하고 추가해 개전부터 종전까지 전모를 기술했다. 한국전쟁의 새로운 역사상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듣는다. 한국어·러시아어·중국어까지 가능한 지은이의 역작이다.

유엔군으로 참전한 각국 군인들이 1953년 7월 휴전협정 조인식장 바깥에 도열한 모습. 당시 미군이 찍은 사진이다. [사진 국사편찬위원회]
소련 자료는 적나라하다. 1950년 1월 30일 소련 지도자 스탈린은 평양의 시티코프 대사에게 보낸 전문에서 매년 2만5000t의 납을 (북한으로부터) 받고 싶으며 김일성이 기술 원조와 전문가 파견을 요청하면 이에 응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스탈린은 군사 원조의 대가를 전략 물자로 얄짤 없이 받아낼 심산이었다”는 게 지은이의 지적이다.

실제로 3월 9일 시티코프가 모스크바에 보낸 전보에 따르면, 김일성은 소련이 1억2000만~1억3000만 루블의 무기를 제공하면 그 대가로 총액 1억3305만500루블 상당의 금 9t, 은 40t, 그리고 우라늄이 함유된 희귀광물인 모나자이트 1만5000t을 인도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소련은 물자 제공뿐 아니라 고문 파견으로 작전 입안도 주도했다. 그해 2월 20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모스크바 방위전과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참전한 바실리예프 중장이 평양에 도착해 조선인민군 수석 군사고문에 취임했다. 지은이는 “그의 파견은 김일성의 (전쟁) 방침에 대한 스탈린의 지지 표명이었다”고 평가했다.

개전 다음날인 1950년 6월 26일 시티코프가 소련군 참모본부의 자하로프 제2차장에게 보낸 암호전보는 이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전보는 “참모본부의 계획대로 인민군은 6월 12일부터 38선 전역에 집결을 시작해 23일 완료했다”며 “각 사단의 작전 계획 수립과 지형 정찰 과정에는 소련 고문이 참여했다”고 소련군의 적극적인 역할을 밝혔다.

중공군 개입에도 상당한 경제적 유인 요인이 발견된다. 1950년 10월 14일 로시친 베이징 주재 소련대사가 마오쩌둥의 발언을 정리해 스탈린에게 보낸 전문은 많은 걸 말해준다. 마오는 “지난번에 우리 동지들이 망설였던 것은 국제 정세, 소련측의 무기 지원 문제, 공군의 엄호 등 문제가 불투명했기 때문”이라며 “이제는 이 모든 문제가 명확해졌다(해결됐다는 뜻)”고 말했다. 마오가 소련에 요구한대로 공군 지원과 무기 대금 지불 연기를 관철하면서 파병을 최종 결정했다는 의미다. 앞서 마오는 10월 8일 저우언라이와 파병 소극파인 린뱌오를 소련에 파견해, 출병하지 않겠다며 스탈린을 압박했고 바라는 바를 얻어냈다. 소련측 전문에 따르면 정전회담도 주도권은 스탈린이 쥐고 있었지만, 마오쩌둥의 의견을 많이 반영했다.

개전 직전 벌어진 치열한 정보활동과 방첩활동에 대한 기록도 흥미롭다. 1950년 3월 5일 모스크바에서 이뤄진 스탈린과 김일성의 면담에서 스탈린이 “남조선 군대 내부에 아군이 침투해있는가”라고 묻자 김일성은 “침투해 있다. 그런데 당분간 활동이 어렵다”라고 답했다. 스탈린은 “남측도 분명 북측 군대에 첩자를 심어두었을 테니 정신 차려야 한다”고 충고하자 김일성은 “그렇다고 보고 필요한 조치를 취하고 있다”고 호응했다.

주한미군의 정보활동도 드러난다. 미군은 남한에서 1948년 8월 15일 단독정부가 수립되자 이듬해 6월 30일까지 철수를 완료하고 소수의 고문단과 정보부서만 남겨 대북정보를 수집했다.

1950년 주한미군군사고문단 연락사무소(KLO)가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김일성은 3월 군 지휘관 회의에서 “남조선 국군은 미군의 지원을 받고 있으나 사기가 떨어져 북조선을 공격할 생각은커녕 남조선 방위에만 전념하고 있다”고 말했다. 북침설이 근거가 없다는 이야기다. 김일성은 또 “38선에서 소요를 일으켜 남조선 국군의 모든 주의를 그 지역으로 돌리고 그 사이 우리 게릴라 부대가 후방에서 괴뢰군(국군)을 공격하는 것이 분단된 우리나라를 통일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전쟁계획을 밝혔다.

미8군 정보참모부(G-2)의 정보보고에도 1950년 3월 8일 “인민군이 남한을 올해 침공할 것이라는 보고를 확보했다”고 기술돼 있다. 이런 사실을 두고 일부에선 미국이 북한의 침공을 알고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펼친다.

이 책은 전쟁의 전 과정에 걸쳐 공산진영 지도자 간의 전문을 포함한 내밀한 부분까지 상세하게 밝힌다. 냉전과 정치가 가렸던 다양한 부분과 주장까지 속살을 드러낸다. 그럼에도 전쟁이 북한의 침공으로 벌어졌다는 남침론이나 그 반대의 북침론은 본질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며, 남북 모두가 군사적 통일을 실현하겠다는 결의 면에서는 대칭적이라는 지은이의 주장은 여전히 논란이다.

지은이는 옛 소련·러시아 전문가로 출발해 『북한 현대사』를 펴내는 등 한반도와 동아시아 전반으로 연구 영역을 넓혀왔다. 일본의 침략전쟁과 위안부 문제, 교과서 문제, 독도 문제 등에서 일본 정부에 비판적 목소리를 높여왔다.

채인택 전 중앙일보 전문기자 tzschaeit@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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