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배낭 메고 사막 250㎞ 지옥 레이스, 경쟁하다 동지 된다

정영재 2023. 8. 5.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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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오디세이] ‘극한 도전’ 트레일 러너 안병식씨
‘달리기는 내게 참 많은 선물을 주었다. 자신감, 도전 의식, 건강, 집중력, 자존감, 혼자만의 시간, 나를 사랑하는 방법…. 달리기는 마르지 않은 샘물이었고, 나에겐 오아시스 같은 존재였다.’

안병식(49) 씨가 자신의 저서 『트레일 러너』(디스커버리미디어) 첫 장에 쓴 글이다. 그는 세계적인 트레일 러너(Trail Runner)이자 트레일 러닝 대회 운영을 총괄하는 레이스 디렉터다. 트레일 러닝이란 포장도로를 뛰는 일반 마라톤과 달리 산과 들, 계곡과 언덕, 사막과 극지를 달리는 신개념 친환경 레이스다. 기록과 순위보다는 자연과 어우러지고 참가자들끼리 우정을 쌓는 걸 더 추구하는 ‘달리는 축제’다. 20여년 전부터 국제대회가 생겨나기 시작했고, 최근 급속히 확산하고 있다.

안병식씨는 트레일 러닝 대회 기획과 운영 대행사인 ‘에이플랜’ 대표도 맡고 있다. 그는 세계 4대 사막 마라톤(사하라·고비·아타카마·남극)을 완주한 그랜드슬램 기록을 갖고 있는데, 이 중 고비사막 마라톤(250㎞) 우승, 남극 마라톤(130㎞)에서는 3위를 차지했다. 그는 2015년 고향 제주에 ‘트랜스 제주’라는 이름의 트레일 러닝 대회를 만들어 세계적인 대회로 성장시켰다. 그는 책의 부제처럼 ‘단지 달렸을 뿐인데 삶이 빛났다’는 기적을 체험하며 살고 있다.

도대체 왜? 위대한 자연·사람 만나기 때문

2009년 남아공에서 열린 칼라하리 사막 마라톤(250㎞)에 출전한 안병식씨. 그는 “흡혈 날파리가 몸에 달라붙어 피를 빨아먹는 바람에 엄청 고생한 대회였다”고 했다. [사진 안병식]
안 대표는 제주도 동남쪽에 자리잡은 표선면 가시리에서 나고 자랐다. 제주대 미대에서 회화를 전공한 그는 운동과는 담을 쌓은 전형적인 ‘올빼미형 인간’이었다. 밤새 작업하고 술·담배에 젖어 살았다. 어느 날 톰 행크스가 무작정 미 대륙을 달리는 영화 ‘포레스트 검프’를 보고 자신 안의 ‘달리기 DNA’가 깨어나는 걸 느꼈다고 한다. 마침 제주대에서 ‘5㎞ 건강달리기’ 대회가 열렸고, 며칠 연습하고 출전해 완주했다. 달리기의 맛을 알게 된 안병식은 점차 뛰는 거리를 늘렸고, 2001년 서울국제마라톤 풀코스를 3시간27분에 완주한다. 이후 울트라마라톤(100㎞) 완주, 국제아이언맨대회(수영 3.8㎞, 사이클 180㎞, 마라톤 42㎞)까지 지경을 넓힌다.

이후 사막 마라톤에 꽂힌 그는 6개월 연습하고 2004년 사하라로 날아간다. 사막 마라톤은 보통 250㎞ 거리를 6일에 나눠 달린다. 텐트와 의료진, 레이스 중간중간 물 보급은 주최 측이 해 준다. 그 외 식량과 필수장비는 본인이 준비해야 한다. 안병식은 10㎏이 넘는 배낭을 메고 섭씨 50도가 넘는 태양 아래 모래폭풍을 뚫고 뛰다 걷다를 반복했다. 발톱 3개를 사하라 모래밭에 내주고서야 그는 완주에 성공한다.

“도대체 그런 델 왜 가는 거야?”라는 물음에 그는 “자연의 가장 위대한 작품, ‘사람’을 만나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알프스에서 만난 닐 로즈(영국·당시 53세)의 얘기를 들려준다. “난 뇌출혈을 겪고 나서 달리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했어. 달리는 건 내 삶의 상징이야. 현대인의 삶은 너무 쉬워져 버렸어. 그냥 버튼을 누르면 모든 게 해결되지. 힘든 걸 일부러 찾아 나서면 그 안에서 자유를 발견하게 돼.”

‘사막 마라톤에서 가장 중요한 건 배낭 무게를 조절하고 견디는 방법’이라는 사실을 안병식은 사하라에서 깨달았다. 그는 “배낭이 너무 무거우면 힘들어서 못 뛰고, 너무 가벼우면 배가 고파서 못 뛴다. 꼭 필요한 물품과 식량을 가장 효율적으로 담는 방법을 연구했고, 매일 벽돌이나 2리터 생수병 몇 개를 배낭에 넣고 한라산을 뛰었다”고 했다. 그리고 2006년 고비사막에서 그는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했다.

트레일 러닝의 매력은 ‘경쟁’에서 ‘공생’으로 바뀌는 과정이다. 레이스 1,2일차에 기록 경쟁을 하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너무나 힘든 코스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가다 보면 경쟁자가 어느새 동지가 된다고 한다. ‘나도 이렇게 힘든데 저 노인네는 얼마나 힘들까. 제발 낙오하지 말고 완주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는 거다. 실제로 깜깜한 밤에 달리거나 거친 계곡을 건널 때는 선수들끼리 뭉쳐서 함께 가기도 한다. 2006년 칠레 아타카마 사막 마라톤에서는 선두 그룹 8명이 손을 잡고 동시에 결승선을 통과했다.

배낭 너무 가벼우면 배고파 못 뛰어 조절

트레일 러닝은 지구환경 보호에 진심인 스포츠다. 큰 대회 때는 ‘그린피스’ 같은 환경단체 로고를 달거나 환경보호 캠페인 문구를 들고 뛰는 선수들을 만날 수 있다. 제주 대회에서도 종이컵 같은 1회용품을 쓰지 않고, 선수들은 페트병이 아닌 개인 물병에 물을 담는다. 안 대표는 “트레일 러닝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환경에 관심을 갖게 된다. 이렇게 좋은 자연에서 오래 뛰고 싶은 마음이 절로 솟아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안 대표는 2010년 ‘오버 런’을 했다. 18일에 걸쳐 프랑스 종단(1150㎞)을 한 뒤 일주일 만에 아픈 무릎을 끌고 17일간의 독일 종단(1200㎞)에 나선 것이다. 결국 무릎에 큰 부상이 왔고, 올바른 치료를 못 받는 바람에 3년간 달리기를 쉬어야 했다. 그 기간에 그는 고향 제주에 트레일 러닝을 들여왔다.

“한라산, 오름, 돌담, 삼나무 숲길, 하늘빛 바다를 낀 해안, 화산의 기억이 깃든 용암, 제주의 허파 곶자왈…. 낮에는 세계의 러너들이 유네스코 자연유산을 온몸으로 체험하며 달리고, 밤에는 모닥불을 피워놓고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는 특별한 러닝 스토리를 만들고 싶었다”고 안 대표는 말했다. 그의 옹골찬 꿈이 표선 돌담밭의 감귤처럼 익어가고 있다.

■ 10월 제주 국제트레일대회, 외국인 참가자 작년의 9배

지난해 10월 트랜스 제주 국제트레일러닝대회 출발 모습. [사진 서귀포시청]
2015년 시작된 ‘트랜스 제주 국제트레일러닝대회’가 한 단계 점프했다. 10월 6~8일 열리는 대회 참가인원이 지난해(1700명)의 두 배 가까운 3109명을 기록했다. 8월 말 참가신청이 마감되면 3500명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외국인 참가자는 지난해 160명에서 올해는 1382명으로 8.6배 늘었다. 제주 대회가 지난 3월 UTMB 월드시리즈로 선정된 영향이 컸다. 프랑스 샤모니에서 매년 열리는 UTMB(Ultra Trail du Mont Blanc·몽블랑 울트라 트레일)는 트레일 러너의 ‘버킷 리스트’라고 할 만한 대회다. 여기에 출전하려면 UTMB 월드시리즈 대회 중 하나를 완주해야 하는데, 이번에 ‘트랜스 제주’가 36번째 월드시리즈 대회로 선정된 것이다.

대회는 두 군데에서 나눠 열린다. 100㎞와 50㎞ 참가자들은 서귀포 월드컵경기장에서 출발해 한라산에 올랐다 다시 월드컵경기장으로 돌아오는 코스를 달린다. 100㎞는 10월 7일 오전 6시에 출발해 한라산 윗세오름과 백록담을 찍은 뒤 29시간 안에 들어와야 한다. 안전을 위해 경기 전날에 깐깐한 장비 및 배낭 검사를 통과해야 경기를 뛸 수 있다.

트레일 초보자들을 위해 10㎞와 20㎞ 코스도 준비했다.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에 있는 1000만㎡ 규모의 목장(조랑말체험공원)과 인근 오름을 돌면서 가을 제주의 풍광을 담아가는 코스다.

서귀포시청 체육진흥과 홍정욱 주무관은 “트랜스 제주는 코스 만족도가 매우 높은 대회다. 서귀포 신시가지에 숙박시설과 교통편이 완벽하게 준비돼 있어서 해외 선수들이 편안하게 경기에만 집중할 수 있다. 특히 최근 K컬처 영향으로 한국을 동경하는 외국인들의 참여가 크게 늘었다. 트랜스 제주가 아시아를 대표하는 트레일 대회로 자리 잡을 것”이라고 말했다.

안병식 레이스 디렉터는 “일반 러닝화가 아닌 트레일용 신발을 준비해야 한다. 초보자는 하루 1~2시간 정도 연습하되 가능하면 산을 많이 타는 게 좋다. 마라톤과 트레일은 쓰는 근육이 다르다”고 조언했다.




정영재 문화스포츠 에디터 jerr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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