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볼에 밀리고 협업 치중 역효과, 김 빠진 수제맥주

오유진 2023. 8. 5.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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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제맥주 인기 왜 시들해졌나
“곰표맥주요? 한때는 없어서 못 팔았는데, 요샌 찾는 사람이 없어서…. 매장에 없는 줄도 몰랐네요.”

지난 1일 서울 마포구에 있는 편의점 CU의 맥주 매대에는 각양각색의 맥주 30여 종이 진열돼 있었다. 다섯 칸으로 나누어진 매대 가장 위 칸에는 355㎖ 국산 맥주가, 가장 눈에 잘 띄는 ‘골든 존(golden zone)’에는 500㎖ 수입 맥주가 빼곡히 들어찼다. 연일 품절 대란인 아사히 슈퍼드라이 생맥주가 진열되는 칸은 텅 비어있었고, 한때 편의점을 호령했던 국산 수제맥주는 가장 아래 칸으로 밀려나 있었다. 이곳 점주 한모(39)씨는 “요즘엔 일본 맥주가 가장 잘 팔리고, 그 다음이 4캔 11000원 맥주”라며 “국산 수제맥주는 한때 반짝하더니 요즘은 찾는 손님이 거의 없다”고 말했다.

재미 잡으려다 가장 중요한 맛 놓쳐

그래픽=김이랑 기자 kim.yirang@joins.com
코로나19 확산으로 ‘홈술’ 트렌드가 확산하면서 인기를 끌던 국산 수제맥주의 질주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수제맥주 ‘열풍’이 사그라지면서 판매량이 급감하고, 이로 인해 주가까지 곤두박질치고 있다. 2018년 수제맥주의 소매점 판매 허용 후 연간 세 자릿수 성장률을 기록하던 수제맥주의 매출 신장률(전년 대비 판매량 증감률)은 올 상반기 기준 한 자릿수로 내려앉았다. 2019년 220.4%를 기록했던 CU의 수제맥주 매출 신장률은 2020년 498.4%, 2021년 255.2%로 성장 가도를 달리다 지난해에는 60.1%로 꺾였고, 올해 상반기에는 4.3%에 그쳤다.

수제맥주의 주요 유통채널인 편의점에서 고전하자 업계 대표주자들도 타격을 면치 못하고 있다. 2년 전 수제맥주 업계 최초로 기업공개(IPO)에 성공한 제주맥주의 주가는 코스닥 상장 이후 줄곧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2021년 5월 26일 상장 첫날 공모가(3200원)의 150%인 4900원에 출발해 지난해 1월 2050원까지 하락했다. 지난달 28일에는 1218원으로 공모가의 38% 수준에 신저가를 기록하기도 했다. 4일 종가는 1251원으로 신고가 대비 약 25% 수준이다. 제주맥주는 IPO 당시 공모주 일반청약 경쟁률이 1748.3대 1에 달할 정도로 관심이 높았다. 청약 증거금만 5조8500억원이 몰린 바 있다.

IPO를 앞두고 있는 업계 매출 1위(327억원) 세븐브로이는 매출이 반토막 났다. 올해 1분기 연결기준 매출액은 53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47.55% 감소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3월에는 주력제품인 ‘곰표 밀맥주’의 상표 계약이 종료되며 실적에 먹구름이 드리운 상태다. 하루가 멀다 하고 줄지어 신제품이 나오던 수제맥주의 인기가 갑작스레 주저앉은 것은 브랜드 콜라보레이션 위주의 과도한 마케팅이 한계를 맞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명욱 주류문화 칼럼니스트는 “재미를 추구하려다 가장 중요한 맛을 놓치는 바람에 소비자들의 재구매가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고 있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수제맥주 시장에서는 2020년 5월 CU와 대한제분·세븐브로이가 내놓은 ‘곰표 밀맥주’가 역사적인 히트를 하자 이와 유사한 ‘백양BYC비엔나라거’ ‘유동골뱅이맥주’ ‘캬 맥주’ 등이 잇따라 출시됐다. 맥주와는 관련이 없는 라면이나 속옷 브랜드와의 협업에 치중하면서 정작 중요한 맥주 맛에 대한 마케팅은 부족했던 것이다. 명욱 칼럼니스트는 “수제맥주는 ‘수제’이기 때문에 고급 제품이라는 이미지가 강하다”며 “하지만 편의점 위주로 대량 판매에 나서면서 고급 이미지가 훼손된 것도 판매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분석했다.

수제맥주에 몰렸던 수요가 엔데믹을 맞아 수입맥주와 위스키, 하이볼 등으로 이동했다는 점도 수제맥주 업계에 타격을 입혔다. 올해 상반기 CU·GS25의 수제맥주 매출신장률은 각각 4.3%, 25.5%에 그쳤으나 일본맥주는 평균 292.5%, 위스키는 평균 48%로 크게 늘었다. 전미영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 연구위원은 “과거 허니버터칩, 최근의 먹태깡 대란처럼 비슷한 유행을 겪다 지금은 한풀 꺾인 것”이라고 분석했다. 문정훈 서울대 푸드비즈니스랩 교수는 “코로나19 이후 외식 시장이 다시 살아나면서 수제맥주가 차지하던 자리에 이른바 RTD(Ready To Drink·즉석음용음료) 하이볼이 들어섰다”며 “원자재 비용이 상승하는 상황에서 수제맥주에 비해 비용이 적게 든다는 점도 한몫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 “맥아 개발 등 본질적 노력 필요”

시들해진 수제맥주와 하이볼의 급성장에 수제맥주업계는 사업 규모 축소와 다각화에 도전하면서 생존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제주맥주는 6월 외식 브랜드 ‘달래해장’을 운영하는 달래에프앤비 인수 계약을 체결하며 식음료(F&B) 사업으로의 확장을 공식화했다. 제주맥주 관계자는 “수제맥주 시장 과도기가 끝날 때까지는 광고·마케팅 비용을 최소화하고, 기존의 대표 제품 위주로 수익성을 강화할 계획”이라며 “리뉴얼된 곰표맥주와 달래에프앤비를 중심으로 매출 확장 방향을 잡고 있다”고 전했다. 1세대 수제맥주 회사인 카브루는 수제맥주업체에서 RTD 주류업체로의 변신에 나섰다. 지난달 6일에는 GS25, 국내 위스키 장인 김창수 대표와 협업해 ‘김창수 하이볼’ 3종을 출시했다. 카브루 관계자는 “맥주만으로는 시장 상황을 이겨내기 어렵다고 판단해 다양성을 고민한 결과”라며 “맥주 레시피 개발은 꾸준히 하되 수요가 있는 하이볼 등으로 영역을 넓혀나갈 계획”이라고 전했다.

다만 주류업계에서는 이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나온다. 과도한 마케팅에 열을 올리다 수제맥주 본질을 놓쳤던 것처럼 타 주류로 눈을 돌리면 수제맥주만의 정체성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이다. 명욱 칼럼니스트는 “수박 겉핥기식의 제품군 다양화보다는 국산 맥아 개발이나 유통채널 다각화 등 맥주를 더 잘 만들기 위한 본질적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라며 “수제맥주 본연의 다양성에 집중해 차별화된 맛을 보여주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오유진 기자 oh.yoo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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