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문화] 내가 귀하면 남도 귀하다

2023. 8. 4. 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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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실수 용납 안하는 사회
자기만 옳고 자기 권리만 중요
남에게 함부로 할 권리는 없어
권리에 따른 책임·의무 알아야

오랜만에 마트에 가서 장을 봤다. 60대의 한 여성이 내 물건을 계산하는 중간에 허겁지겁 뛰어왔다. 자기가 아이스크림을 다섯 개 샀는데 영수증에 여섯 개로 찍혀 있으니 하나 값을 돌려 달라는 것이었다. 내 물건의 바코드를 찍고 있던 계산원은 참으로 친절하고 느긋하게 대꾸했다. “그랬을까요?”

60대 여성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랑 남편이 세 번씩 셌는데 우리가 틀렸겠어요, 당신이 틀렸겠어요?” 나는 여기서부터 납득되지 않았다. 나와 달리 계산원은 참으로 선량했다. “하나 취소해드리면 될까요? 아니면 하나 더 가져가실래요?”
정지아 소설가
나는 두 사람 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들이 세 번씩 셌으니 다섯 개가 확실하다는 주장을 펴는 여성도(아이스크림을 이미 먹었거나 실제 여섯 개일 수도 있지 않은가? 이 여성은 다섯 개가 확실하다는 아이스크림을 들고 오지도 않았다), 물건과 영수증을 대조해 보지도 않고(먹었을 경우 확인해 봤자 소용도 없겠지만) 취소해 주겠다는 계산원도 이상하기만 했다.

원하는 대로 해 주겠다는데도 여성은 영수증을 계산원의 코앞에 디밀고 흔들며 소리쳤다. “계산 하나 제대로 못 하면서 월급은 따박따박….” 착한 계산원은 부드럽게 여성의 말을 잘랐다. “죄송합니다. 하나 취소해드릴게요. 잠깐만요.”

내 물건의 계산이 거의 끝나가던 터라 계산원은 내 것을 마저 처리했다. 한 1분 걸렸을까? 60대 여성은 그 잠깐을 참지 못했다. 아니, 얼씨구나 하는 듯했다(내가 계산적이고 못된 인간이라 의심했을 수도 있다). 그는 갑자기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취소하고 하나 새로 찍고 하느니 그냥 하나 더 가져갈라요”라면서 아이스크림 코너로 총총 사라졌다. 카드를 주고받던 시점이라 여성이 진짜로 같은 가격의 같은 아이스크림을 하나만 더 가져갔는지 확인하지 못했다. 같은 손님인 내가 민망해서 괜스레 한 마디 건넸다. “처리해 준다는데도 참 시끄럽네요.” 계산원은 말없이 빙긋 웃었다. 저런 정도의 손님은 약과라는 듯이.

오랜만에 반찬 만드느라 정신없이 오후를 보내고 커피를 내렸다. 밖은 세상 만물을 다 태워 버리겠다는 듯 뜨겁고, 에어컨을 켠 집안은 시원했다. 유리창 하나의 차이일 뿐인데 너무 다른 세상 안에서 바깥을 바라보며 문득 그 여성이 떠올랐다. 그 여성은 내 추측과 달리 실제로 억울했을 수 있다. 그렇다고는 해도 계산원의 행위에 악의는 없었다. 실수였을 뿐이다. 그 정도의 실수에 소리까지 버럭버럭 질러야 했을까?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는 타인의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다. 모든 현상에는 원인이 있다. 신자유주의 시대를 견뎌내느라 누구나 다 지쳐 있는 탓일 수도 있고, 민주화 시대를 거치면서 권리 의식이 높아진 덕분일 수도 있다. 권리의식이 높아졌다는 건 무조건 좋은 일이다. 지식노동자든 육체노동자든, 여성이든 남성이든, 어른이든 어린이든, 한국인이든 외국인이든, 정당한 권리를 누릴 자격이 있다. 인간은 누구나 존중받아야 하니까. 그렇다고 해서 권리가 만능의 키는 아니다.

소비자는 어떤 물건을 정당한 가격에 소비할 권리가 있지만, 그 물건을 팔고 계산하는 사람에게 함부로 대할 권리까지 있는 것은 아니다. 학생은 미성년자로서 충분히 보호받아야 하고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권리를 누려야 하지만, 어른이나 선생님을 무례하게 대할 권리까지 있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누려야 할 권리의 한계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 또한 이해해야만 모두가 어우러져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온전한 주체로 세상을 마주하고 해석하고 행동하지만, 동시에 나를 제외한 모두에게는 남이다. 남의 사소한 실수에 자신의 권리 운운하며 갑질을 해대는 순간, 그는 80억의 남으로부터 똑같은 일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 너나없이 자기만 옳고 중요한 존재라고 떠들어내는 씁쓸한 나날이다. 내가 귀하면 남도 귀하다. 그가 계산원이든 노동자든 학생이든 교사든 간에.

정지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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