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물 속 빌런들… ‘악의 서사’를 논하다

김수미 2023. 8. 4.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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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기난동 범죄자 서사 보도 논쟁
“연민의 시선… 악인 합리화” 비판
“창작물까지 배제 지나치다” 반박
평론가 9인 악의 유형·방식 고찰
“악, 도처 존재… 보는 것이 아는 것”

악인의 서사/듀나 외 8명/돌고래/1만8000원

지난 3일 14명의 부상자를 낸 분당 ‘서현역 흉기 난동 사건’이 지난달 흉기로 1명을 살해하고 3명을 다치게 한 ‘신림역 사건’의 모방 범죄일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신림역 사건 피의자 조선(33)의 범행 동기가 보도되는 과정에서 그가 부모 없이 할머니 손에 자라며 소년원을 드나들고, 키가 작아 열등감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 공개됐다.

조선에게 ‘불우한 어린 시절’이라는 서사가 부여된 셈이다. 아직 경찰 수사 결과가 나오지 않았지만, 사회에 대한 불만과 열등감을 가진 이들이 조선의 서사에 공감하며 서현역 사건이 발생하고 모방 범죄 예고가 잇따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신림동 흉기 난동 사건' 피의자 조선이 지난달 28일 오전 서울중앙지방검찰청으로 송치되기 위해 서울 관악경찰서를 나서는 모습. 연합뉴스
지난해 소셜미디어를 뜨겁게 달궜던 이슈 중 하나가 바로 ‘악인에게 서사를 주지 말라’였다. 잔혹 범죄를 선정적으로 보도하는 언론의 행태를 규탄하며 시작된 논쟁은 영화와 드라마, 소설 등 창작물 전반으로 확대됐다. 매혹과 연민의 시선으로 악인과 악행을 묘사하는 방식이 악을 합리화한다는 비판과, 실제 사건이 아닌 허구의 창작물에서까지 악인의 서사를 배제하는 것이 옳으냐는 반박이 맞섰다. 그동안 예술가의 도덕성이나 스캔들이 비판의 대상이었다면, 작품 속 허구 인물의 서사 자체가 도마에 오른 것이다.
지난해 소셜미디어에서 휘발된 이 논쟁을 지면으로 옮긴 신간이 나왔다. ‘악인의 서사’(돌고래)는 9명의 평론가가 영화와 소설, 논픽션, 웹툰 등의 창작물에 나타난 악의 유형과 저자가 악을 재현한 방식을 다양한 각도와 층위에서 고찰한다.
영화 '양들의 침묵'의 '한니발 렉터'. 영화 장면 캡처
범죄물에서 악당을 ‘입체적인 캐릭터’로 만드는 것이 일종의 보편 공식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범죄물 특성상 선명한 선악 구도는 단조롭게 보일 수 있는 데다, 서사에서 악이 납작해지면 선(善) 또한 평평해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역학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악인은 궁금증을 자아내는 과거와 범행 동기가 될 만한 사연이 있고, 전혀 범죄자라고 생각할 수 없는 평범한 또는 그 이상의 외모와 능력을 갖춘 미스테리한 존재로 진화해 왔다. 인간의 복합성과 양가성, 도덕적 회색 지대와 윤리적 딜레마를 내포하면서 입체적이고 매혹적인 캐릭터로 거듭났다.
영화 '다크나이트'의 '조커'. 영화 장면 캡처
범죄자를 찾아내고 추격하는 과정에서는 으레 악인의 정서에 영향을 준 성장 배경과 사건이 삽입되곤 한다. 그러면 ‘나쁜 환경이 나쁜 사람을 만들었다’ 또는 ‘만들어진 범죄자’라는 당위가 분노와 혐오의 자리를 비집고 들어오고, 독자(시청자)들은 감정 이입을 하며 범행 동기를 수긍하게 된다.

그러나 악인은 자신이 겪은 불행을 아무 상관없는 타인의 탓으로 전가하고 운 나쁘게 자신과 마주치거나 관계를 맺게 된 이들에게 분노와 가학 심리를 해소할 뿐이다. 어린 시절의 결핍과 학대 경험이 범죄로 이어진다는 것은 단순하고 편리한 해석에 불과하다.

역사적으로 가장 잔혹한 살인범들을 만나 면담한 범죄심리 전문가 로버트 레슬러는 “어린 시절의 정신적 충격이 아니라 비뚤어진 사고방식을 키우는 것이 문제였다. 살인범들은 어린 시절이나 사춘기부터 자기 마음속에서 수도 없이 보았던 것들을 실현하려고 살인을 저지른다”고 일갈했다.

반면 ‘악인에게 서사를 주지 말라’는 명제를 충실히 따르고 있는 웹소설은 정반대의 딜레마에 빠졌다.
듀나 외 8명/돌고래/1만8000원
이융희 작가는 “웹소설에서의 악인은 고유의 배경과 서사를 지닌 독자적, 입체적 인물이라기보단 주인공의 전지전능함을 방증하는 일회적, 기능적 도구로 이용되고 금세 퇴장한다”고 설명한다. 이는 짧은 분량, 화 단위 분절적 텍스트라는 장르적 한계도 있지만 권선징악, ‘사이다 결말’을 원하는 독자들이 구독료와 댓글 자본을 무기로 작품에 적극 개입한 결과다. 서사가 배제된 악인 캐릭터가 단순하고 납작해지는 이유다.

책에서 9명이 저자는 악의 서사에 대한 공통된 논점이나 방향을 제시하지 않고 각자의 시각에서 통찰한다. ‘악의 서사=범죄의 합리화’라거나, 악인에게 목소리를 주지 말자는 결론으로 직행하는 것은 경계해야 할 듯하다. 김용언 편집장의 말처럼 “악은 도처에 존재하고, 보는 것이 아는 것이며 지식은 실천의 밑거름이 되”기 때문이다.

김수미 선임기자 leolo@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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