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특징을 강력하게 결정짓는 장소…‘집’에 귀 기울여보라[김소연의 논픽션 권하기]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하재영 지음
라이프앤페이지|224쪽|1만5000원
또 이사를 했다. 테어나 몇 번째 이사인지 이제는 세어보지 않는다. 잘 모르는 동네의 아주 사소한 것들에 이끌려 이사를 결정하고 그 동네를 탐닉하면서 그 동네라서 가능한 이야깃거리를 채집하는 것이 이제는 숙명처럼 되어 있다. 이사를 하고 짐정리를 하다가 창문 바깥을 바라보며 내가 이 집을 선택한 이유가 이 풍경이라는 것에 대해 흐뭇해했다. 창문 앞에는 많이 어린 내가 서 있다. 이런 창문을 갖고 싶어 했던 어린 시절의 나. 그때의 내가 내 옆에 서 있다. 나는 어쩌면 지금의 나를 위해 이사를 하는 게 아니라 어린 시절의 나를 위해 이사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아이에게 선물하고 싶은 창문을 이번에는 선물한 셈이다. 그 시절의 나는 미술을 공부하는 동생과 함께 상가건물의 3층 공간을 얻어서 지냈다. 개인 욕실이 없었지만, 화장실 세면대에 온수기를 달아서 욕실을 대신했다. 그때는 작업하는 용도의 공간이 무엇보다 절실했기 때문에 욕실을 포기했다. 침실도 포기했다. 침낭을 사용해서 아무 구석에서나 쪽잠을 잤지만 작업실이 있어서 행복했다.
욕실과 침실을 포기하고서 나만의 공간을 갖던 그 시절보다야 선택권이 나아진 셈이지만, 집을 구할 때마다 나는 자문한다. 이번엔 무엇을 포기할 것이냐고. 중요한 한 가지를 포기해야 더 중요한 욕망을 구현할 집을 찾을 수 있어서다. ‘서울’을 포기했던 순간부터 치명적인 포기는 안 해도 되었다. 누군가에겐 내가 포기한 ‘서울’이 치명적인 포기일 수도 있겠지만, 어렵게 포기를 결심한 이후, 나에겐 가장 잘한 포기이기도 하다. 내 자신을 은닉할 수 있고, 일을 하고 돌아오는 긴 길 위에서 천천히 모드 전환을 하면서 내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시간도 좋고, 타인들의 감정과 취향에 곧잘 물드는 나의 성정을 거주지의 거리 두기로 인해 지켜낼 수 있어서다.
이사정리의 대미는 책정리다. 책이 너무 많아서 매번 죄송한 마음으로 양해에 양해를 거듭하며 이삿짐센터 사람들을 대하게 된다. 아무리 그에 따른 비용을 추가로 지불한다 해도, 아무리 너그러운 경우라 할지라도, 이사업체에서 파견된 전문가들로부터 투덜거림을 꼭 한번은 듣고야 만다. 사람의 물건 중 가장 무거운 것이 책이다. 이걸 다 읽었냐. 책이 많은 직군은 목사 아니면 작가다. 항상 그렇지만, 처음에는 꼼꼼하게 꽂아주다가 나중에는 아주 엉망진창으로 책장에 책을 쑤셔넣는다. 일을 끝내야 할 시간이 오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도 돌아갈 집이 있는 것이다.
나의 책장에는 ‘명예의 전당’ 코너가 있다. 때마다 변하지만 언제나 변하지 않는 코너는 베스트 에세이를 모아두는 코너다. 그 코너는 책이라는 물성을 지녔다기보다는 우정이라는 감정이 집결해 있다. 한 권 한 권, 휘리릭 페이지를 넘기고 있자니, 저자의 피와 땀과 눈물과 체취와 고백이 숨결처럼 전해져온다. 소설가 하재영의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를 따로 꺼내어 책상 위에 얹어둔다. 태어나서부터 자신이 살아왔던 집에 대한 기록이다. 집이라는 장소가 얼마나 강력하게 한 사람의 특징을 결정짓는지를 하재영은 세세하게 들려준다. 특히 집이라는 장소가 부여한 여성의 사회적, 정치적 지위까지를 꼼꼼하게 짚어내며 기록한다.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는 작가가 살아온 집들로부터 받은 영향을 기록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장소를 기록하는 작가의 인지적 관점이 하나의 장소를 한번 더 재편한다. 그 사유가 그 장소들의 지붕이 되어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나에겐 소중하게 다가왔다. 덕분에 내가 살았던 집들을 조금 다른 관점에서 다시 떠올릴 수 있었다. 내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내가 거주했던 나의 집들로 더듬어볼 수 있었다. ‘명예의 전당’에 이 에세이를 다시 꽂아넣으며, 이 새로운 집을 나답게 친애하고 싶은 마음이 더 짙어졌다.
저자가 낡은 집을 매입하고 아빠와 함께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하여 자신만의 서재를 갖게 된 일산 정발산동의 빌라. 나도 일산의 그 빌라에서 산 적이 있다. 나도 너무나도 낡은 집을 하나하나 수리해서 살았고, 나도 그 집에서 나만의 서재를 처음 갖게 되었다. 그 방의 책상에 앉아서 작업을 할 때에 처음으로 장소가 나의 삶에 기여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고독의 심해에서 침범받지 않을 수 있는 권리를 누릴 수 있었던 최초의 장소였다. 그것은 당연한 권리이지만 여전히 어떤 면에서는 특권에 속하고, 그 특권이 실은 얼마나 첨예한 사회적 맥락인지, 권리를 누리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에세이라 하지만, 자신의 삶에 담긴 역사성과 공공성을 교직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줄 때에 개인의 이야기가 ‘책’으로 완성된다. 하재영이 비추는 것은 자신이 살아왔던 집이지만, 독자는 자신이 살았던 집을 반추하며 하재영의 시선을 따라갈 수 있다. 나에게 집은 무엇인가를 숙고하면서. 내가 살았던 집의 타일과 벽지와 조명이 나를 설명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나의 관점이 나를 설명해준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김소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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