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부림? 알아서 살아남으셔”… 경찰관 글에 공감 쏟아진 이유

이가영 기자 2023. 8. 4. 20:16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흉기 진압 경찰에 수천~수억원 손해배상 판례 열거
“범죄자 인권 지키려다 경찰 죽어난다”
경찰들 “총은 쏘는 게 아니라 던지는 것” 자조
서현역 일대에서 묻지마 흉기 난동 사건이 발생한 3일 오후 경기 성남시 분당구 AK백화점에 경찰과 소방 관계자들이 들어가고 있다. /뉴스1

“칼부림 사건? 국민은 알아서 각자도생하세요.”

도심 흉기 테러가 잇따른 상황에서 한 현직 경찰관이 온라인에 이런 글을 올렸다. 하지만 이 글을 본 네티즌의 분노는 글 쓴 경찰관이 아니라 정부 제도와 사법부를 향했다.

경찰청 소속을 인증한 네티즌 A씨는 4일 게시판에 “칼부림 사건으로 피해 보신 분들, 잘 치료받아 건강해지시길 바라고 위로의 말씀을 먼저 드린다”고 썼다. 이어 “앞으로 묻지 마 범죄 등 엽기적인 범죄가 늘어날 것 같은데, 이대로는 경찰에도 방법이 없다”고 했다. 그는 “호우‧폭염 등 이 세상 모든 문제와 민원은 112신고를 받은 경찰의 무한책임”이라며 “거기에 범죄자 인권 지키려다 경찰들이 죽어 나간다”고 했다.

A씨는 그 예로 공무집행 중 발생한 사안으로 수억대의 손해배상금 지급 판결이 나온 판례들을 거론했다.

가장 먼저 언급한 사례는 2001년 경남 진주에서 벌어진 사건이었다.

실제 재판 기록을 보면, 사망한 권씨는 지역 씨름대회 우승자 출신이었다. 그는 사망 당일 함께 술을 마시던 지인의 목을 깨진 맥주병으로 찌른 뒤 자기 집으로 들어갔고, 그 직후 그의 아내가 ‘남편이 칼로 아들을 위협하고 있다’고 경찰에 신고했다. 권씨는 출동한 경찰을 힘으로 제압하려 들었고, 공포탄 사격에도 몸싸움을 하며 계속 저항하다가 가슴에 실탄을 맞고 숨졌다.

이 사건에 대해, 2008년 대법원2부(주심 김능환)는 권모씨 유족 4명에게 국가가 총 1억1000만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확정했다.

2012년에는 교통법규를 어긴 운전자가 경찰의 어깨를 붙잡는 등 불응하자 얼굴로 손이 온다고 생각한 경찰관은 운전자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다. 이 과정에서 운전자가 넘어지며 전치 8주의 상해를 입었다. 연 소득 2억원가량의 유명 영어 강사였던 운전자는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고, 법원은 4억4000여만원을 배상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2019년에는 양손에 흉기를 들고 출동한 경찰관과 대치하던 여성 정신질환자에게 테이저건을 사용하고, 뒷수갑을 채웠다가 여성이 의식을 잃고 5개월 후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유족은 경찰이 과도한 물리력을 행사했다며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고, 법원은 3억2000만원을 물어주라고 판단했다. 테이저건으로 제압한 후에도 뒷수갑을 채운 건 법이 정한 물리력 행사 기준을 초과한 것이라고 봤다.

이러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은 국가를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당장 경찰관이 내야 할 배상금은 없다. 하지만 국가는 이후에 해당 경찰관을 상대로 구상권을 청구할 수 있다. 공무원 개인이 직무 수행 중 고의 또는 중과실에 따른 불법 행위로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입혔을 때에는 손해배상 책임을 진다는 판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A씨는 “소송 들어오면 지휘부는 나 몰라라 하는 거 한두 번 보느냐”며 “범죄자 상대하면서 소송당하고, 무죄 받고도 민사소송에서 수천, 수억씩 물어주는 게 정상적인 나라냐”고 했다. 그는 “여전히 범죄자를 우대하는 말도 안 되는 판례들이 매년 수십 개씩 쌓여가는데 그거 보면서 무슨 생각이 들겠느냐”며 “칼 맞아가며 일해봐야 국가에선 관심도 없고, 선배들 소송에서 몇억씩 깨지는 걸 보면 ‘이 조직은 정말 각자도생하는 곳이구나’ 하는 생각으로 일하게 된다”고 했다. 이어 “사명감으로 시작한 신입들이 3년이면 무사안일주의 경찰관이 되어갈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적극적인 경찰관은 나올 수 없다”고 짚었다.

서울에서 근무하는 현직 경찰관은 “‘총은 쏘라고 있는 게 아니다. 던져서 맞추라고 있는 것’이라는 선배 경찰관들의 가르침은 대대로 이어져오고 있다”고 했다.

테이저건을 든 경찰. /연합뉴스

◇미국에선 경찰 유죄판결 0.3%, 민사는 노조가 충당

해외 선진국에서는 적극적인 경찰 활동을 지원하고자 다양한 책임 감면 제도를 운영 중이다. 미국에서는 경찰이 공무수행 중 물리력을 사용해 타인에게 위해가 발생했을 때 유죄 판결까지 받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총기를 사용해 인명 살상이 초래된 경우에도 유죄 판결받는 경우는 0.3%에 불과하다.

민사적으로도 면책권 덕에 경찰관의 손해배상에 대한 면책은 폭넓게 이뤄진다. 과잉 제압으로 사망자가 발생했을 때도 유족은 경찰관 개인이 아닌 주 당국이나 시 당국을 상대로 거액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한다. 만약 경찰관 개인이 배상해야 할 경우에도 경찰관 노조에서 대신 해결하기 때문에 개인이 입는 피해는 상대적으로 적다.

◇전문가 “경찰들의 소송 공포, 법 제도적으로 해소해야”

이웅혁 건국대 경찰학과 교수는 조선닷컴에 “강력한 공권력을 원한다면 현장에서 일하는 경찰을 보호해주는 게 우선”이라며 “일선 경찰에게만 책임을 묻고 고위층은 빠져나간다면 소송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할 수 없다”고 했다.

이 교수는 정부가 법적으로 제도를 정비해야 위축된 공권력을 회복할 수 있다고 했다. 우선 경찰관직무집행법을 고쳐 경찰관 직무 수행 중에 일어난 과실에 따른 감면 적용 범위를 확대해야 한다고 했다. 현재는 특정범죄 상황과 일정한 조건에서만 형의 감면을 받을 수 있다. 또한 소송 대상에서 경찰 개인은 제외하도록 국가배상법을 개정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이 교수는 “국가가 소송의 주체가 되어 경찰관 개인이 소송 과정을 홀로 감당해야 하는 부담을 덜어줘야 한다”고 했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