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의 소통] 시간은 나는 게 아니라 일부러라도 내는 거다
메뉴만 바꿔 식사 제안 남발
빈말·식언은 누군가엔 모욕감
무더운 요즘 남도에 출장을 가면 가끔 민어 음식을 접한다. 민어는 여름이 제철이라고 하는데, 땀을 많이 흘리는 사람에게 보양식으로 정말 좋다. 민어를 마주할 때마다 투자를 잘해 꽤 많은 돈을 벌었다고 하는 어떤 지인이 떠오른다. 모임에서 마주친 그는 대뜸 내게 식사 제안을 해왔다. "여름에 민어탕이나 한 끼 합시다! 곧 연락드릴 테니 꼭 시간 내세요! 밥이라도 함께해야지 사는 게 뭐 있어요?" 이쪽에서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누군가 밥을 사겠다는 제안을 받았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어쩌면 그의 말처럼 밥을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곧 연락한다고 했던 그는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가깝도록 지금껏 무소식이다. 민어가 헤엄쳐 멀리 외국으로 도망가지나 않았을까 걱정이다.
알고 보니 그는 여름 민어, 가을 전어, 겨울 복매운탕, 봄에는 굴비로 메뉴만 달라질 뿐 식사 제안을 남발하고 다니는 부류였다. 정작 본인은 누구에게 어떤 제안을 했는지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는 게 주변 사람들의 전언이었다. 이처럼 빈말을 입에 달고 사는 데에는 남녀의 차이가 없는 걸까? 작년에 만났던 어느 여성도 비슷한 경우.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누군가 나의 어머니가 쓰러져 병원 생활을 하고 있다는 내 근황을 꺼내자 그녀는 "한 달 동안 제 기도 제목으로 작가님 어머니 건강 회복을 올려놓겠습니다"라고 하는 것 아닌가. 나는 비록 종교가 없지만, 갑작스레 병원 입원과 간병인 구하기, 코로나 상황 등이 겹쳐 무척 힘들 때여서 기도해주겠다는 그녀의 한마디에 얼마나 위로가 되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최근 다시 만난 어떤 자리에서 그녀는 처음 듣는 듯 '모친께서 어디 편찮으신가요?'라고 태연히 묻고 있었다. 그녀는 사회활동이 활발한 사람으로 평소 진정성의 중요성을 입에 달고 살기에 더욱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곰은 쓸개 때문에 죽고 사람은 혀 때문에 죽는다"는 옛사람의 지혜 어린 경구처럼 쓸데없는 빈말과 식언을 조심해야 한다. 이쪽에서 요청한 적도 없고 굳이 그럴 필요도 없는데 약속을 제안하거나 괜한 말을 함으로써 스스로 신용을 잃어간다. 몇 년 전 서울의 어느 대학에서 미디어와 소통에 대해 가르치게 되었을 때 우리가 얼마나 빈말에 익숙한 사회가 되었는지 절감할 수 있었다. 그 대학, 그 학과에는 중국 등 외국에서 온 유학생들이 제법 있었는데, 한국에 와서 가장 놀란 일로 동료 한국 학생들이 "우리 한번 밥 먹어!"라는 말을 꼽았다. 자국에서는 꽤 친해지기 전까지는 함께 밥 먹자고 하지 않는데 서울 학생들은 상당히 마음이 열려 있다며 감탄했다고 한다. 그런데 학기가 끝나도록 진짜로 밥 먹자고 제안한 동료가 거의 없었다는 말에 나는 부끄러워졌다. 나라마다 관용적 표현과 문화의 차이는 물론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알게 모르게 빈말에 익숙해져 있음을 확인하게 된 순간이었다. 한쪽에서는 그리 심각하지 않게 던진 말이라도 상대방으로서는 자칫 모욕감으로 받아들여질 소지도 있다.
우리는 도대체 왜 빈말에 익숙한 사회가 된 걸까? 체면이라는 전통 때문에 그런 걸까? 잘 보이고 싶은 공연한 욕심 때문일까? 빈말은 스스로 평판을 깎는다. 말과 시간 개념과 관련해 옛 직장 상사가 해준 충고가 떠오른다. 모임에 몇 번 늦는 나의 모습을 본 그는 한마디했다. "모임에 일찍 오는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시간이 남아돌아서 그런 게 아니라네. 상대방의 시간을 존중하기 때문이지." 당시에 나는 늘 바빴고, 업무의 자율권도 거의 없었기에 지각을 반쯤 당연하다고 자기합리화하고 있었던 터였다. 둔기로 머리를 강타당한 듯 부끄러워하는 내게 술 한잔을 따라주더니 그는 다정하게 말했다. "자네도 언젠가 직급이 올라갈 텐데 그때를 위해서 이 말을 기억했으면 좋겠어. 시간은 나는 게 아니고, 일부러라도 내는 거야!"
[손관승 리더십과 자기계발 전문 작가 ceonomad@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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