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이면] 독서의 연대기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한 편의 이력서가 쓰고 싶어졌다. 내가 책을 읽어온 이력에 대해서 말이다. 늘 책이란 걸 읽었지만 늘 같은 이유로 읽은 건 아니었다. 소년기의 책은 다른 세계로 떠나는 탐험이었다. 집에 세계동화전집과 위인전이 있었고, 열 권짜리 컬러학습대백과가 있었다. 그림책이 없던 시절이었으니 백과사전이 그 역할을 대신했으리라. 이 책들을 통해 나는 미지의 시공간으로 이동해 성냥팔이 소녀가 되어보기도 했고, 대양을 가로지르는 흰긴수염고래가 되어보기도 했다. 중고교 시절에는 '감정'이 독서를 지배했다. 뭔가에 간절히 닿고 싶다는 느낌으로 헤세, 크로닌, 지드, 톨스토이, 스타인벡의 책들을 읽었다. 1000쪽이 넘는 두툼한 고전들을 주로 고3 때 읽었는데 아침에 등교해 교과서 대신 이 책들을 펼쳐놓고 저녁까지 읽었다. 대학 입시에 매진해야 할 시기에 그와는 전혀 무관한 시간여행을 떠나 이리저리 방황했다. 다른 세계로의 이동이라는 면에서 소년기의 독서와 상통하는 면이 있었지만, 청년기의 다른 세계는 '도피'의 성격이 짙었다. 현실의 나는 가질 수 없는 어떤 것을 독서를 통한 감정 이입을 통해 얻었다. 다른 측면을 하나 더 찾자면 대중과의 '거리두기'이자 '제스처'로서의 독서다. 나는 책도 안 읽는 너희와 다르다는 존재의 과시욕으로 독서에 몰입했다.
초년기의 독서는 '수집가의 열정'을 동반한다. 김용의 무협소설에 푹 빠져서 한두 권씩 사 모은 게 어느 날 서가 일곱 칸을 채웠던 기억이 또렷하다. 그리고 김홍신, 이외수, 이문열, 한수산의 소설을 섭렵했다. 책 속엔 작은 영웅들이 있었다. 그들은 내게 모델이었다. 이문열의 '젊은 날의 초상'을 읽지 않았다면 나는 국문과로 진학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 무렵까지의 독서에서 명확히 드러나는 특징은 '반복 읽기'다. 책이 많지 않았던 시기이기도 했지만, 책에서 읽은 이야기를 '내 것'으로 소유하려는 욕망이 읽고 또 읽게 만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이 시기에 반복해서 읽은 것들은 아직도 '내 것'으로 고스란히 남아 있다.
20·30대의 독서는 지식과 깊이 연관된다. 시집에서 문예지로, 잡지에서 이론서로 뻗어나가는 방사형 독서는 거미줄처럼 엉키면서 나름의 지식 체계를 형성했고, 그렇게 형성된 소우주는 더 큰 우주를 향해 항해했다. 지적 욕구는 마흔 무렵이 되어 어느 정도 잦아든다. 이때부터는 독서의 동력이 약해졌다. 사회생활이 일상을 지배하면서 독서는 스트레스 풀기, 킬링타임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추리소설과 동양 고전, 역사서 읽기가 느슨하게 삶을 둘러쌌다. 내면에 지식을 쌓기보다 음미하고 비교하는 읽기의 세계도 열렸다. 마흔 이후의 독서는 '다른 자아 찾기'와 닮아 있는 것 같다. 지금까지 관심을 두지 않았던 분야나 사물, 인물과 새롭게 만나기도 하고, 생활 속의 관심사가 거꾸로 관련된 책을 불러다 주는 일은 이전까지는 없었던 일이다.
하지만 오십대에 진입하면서 독서의 동력은 점점 고갈되었다. 책을 통해 뭔가를 얻고자 하기엔 처리해야 할 정보가 너무 많은 탓이다. 책도 손에서 놓지 않아야 계속 찾게 된다. 깊어지고 넓어지는 맛에 독서를 이어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 리듬을 끊어놓는 게 너무 많다. 일단 끊어지면 독서는 진입장벽이 높은 뭔가로 바뀌어 있다.
그래서일까. 요즘 사람들은 책을 혼자 읽지 않고 함께 읽는다. 내 주변에서 책 좀 읽는다 하는 거의 모든 사람이 독서모임을 하고 있다. 필요성은 느끼지만 혼자서는 자신이 없는 이들이 모여서 강제성을 상호 부여해주는 것이다. 함께 읽기에서는 사람과의 만남이 텍스트 못지않은 중요성을 띠고 있다. 책이 세상과 만나는 창이 돼줌으로써 마이크로 소사이어티의 '경첩' 역할을 한다.
서당에서 서탁에서 낭랑하게 읽던 '낭독(朗讀)'에서, 골방과 도서관에 틀어박혀 고민하고 실천하던 무거운 '묵독(默讀)'의 20세기를 지나 우리는 '여독(與讀)'의 시대를 맞고 있다. 역사와 정치와 언론에 수시로 사망 선고가 내려지는 이 시대에 책은 완충제, 매개제, 강장제, 보충제로서의 일에 더 집중하고 있다. 오염된 정보들을 걸러주는 정리제 역할도 무시할 수 없다. 메인스트림은 아니지만 없어서는 안 되는 책을 사이에 두고 사람들은 모이는 중이다.
[강성민 글항아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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