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몫’을 위해, ‘제 몫’을 쓰는 여성들[책과 삶]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352쪽 | 1만6800원
“당신은 그런 글을 쓰고 싶었다. 한번 읽고 나면 읽기 전의 자신으로는 되돌아갈 수 없는 글을 … 언제나 마음 깊은 곳에 잠겨 있는 당신의 느낌과 생각을 언어로 변화시켜 누군가와 이어질 수 있는 글을….”
최은영의 단편 ‘몫’ 중 ‘해진(당신)’이가 대학교지 선배 ‘정윤’의 글을 읽고 든 생각과 바람이다. 글 제목은 ‘A여자대학교에서의 집단 폭력, 일부 학생들의 문제인가’다. 1996년 집단 폭력(실제 사건이다)의 수위가 더 높았다. 해진과 정윤이 다니던 학교 학생들이 A여대 광장을 점거하고 기차놀이를 하는 과정에서 A여대 많은 학생이 머리채를 잡히고 주먹으로 맞았다.
해진은 건조한 문장에 막힘 없는 논리와 차근차근한 설명을 담아 폭력을 비판한 정윤의 글을 읽으며 “남자 선배들이 그 사건을 영웅담으로, 농담으로 이야기할 때 그저 미친놈들의 헛소리라고 생각했던 과거의 자신을. 그저 듣기 싫고, 피하고만 싶어서 못 들은 척했던 그때의 자신”을 바라본다. “정윤의 글을 읽은 당신은 그 글을 읽기 전의 당신이 아니었다.”
‘몫’의 또 다른 주요 인물인 희영이도 교지 기자다. 희영은 수년 전 ‘B대학교 대학원 성희롱 사건’ 분석 글을 쓰겠다고 발제한다. “개인의 윤리는 개인의 문제일 뿐, 그것을 정치와 사회의 흐름을 읽어야 하는 지면에서 굳이 다룰 필요는 없다”는 요지의 말을 한 용욱에게 “일개 여성 문제가 아니라 대학원 사회의 기형적인 권력구조에 관한 문제”라고 반박하며 희영의 아이템을 지지한 이가 정윤이다.
희영과 해진은 가정폭력에 관한 취재도 함께한다. “맞아 죽은 여자들의 역사를 정리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해진은 울면서 글을 썼다. 해진은 자기 마음이 자신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들의 마음에 붙을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세 여성 관계가 어긋난 건 기지촌 여성에 관한 문제였다. 굵직한 정치사회 의제가 많았던 1997년 겨울 희영은 1992년 미군 성범죄를 다루고 싶어했다. “그 문제를 왜 지금 다뤄야 하는 거죠”라는 용욱의 질문에 희영은 “아직도 그곳에 사람이 사니까요”라고 답했다. 희영은 “그렇게 멸시하고 인간 취급도 안 하던 사람을 민족의 누이라고 부르는” 걸 해석하고 싶었다. “가해자가 미국인이 아니라 한국인이었어도 그렇게 사람들이 분노했을까 싶고…….”
정윤이 반박했다. “기지촌 사건은 민족 모순, 계급 모순 아래에서 배태된 문제죠. 거대한 구조를 봐야 해요.” 희영이 다시 반박했다. “주한미군이 철수하면 그런 일이 없어질 거라고, 통일 조국이 되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여자들이 맞고, 강간당하고, 죽임당하는 일이 없어질 거라고 믿어요, 언니?” 정윤이 다시 받아쳤다. “민족 주권과 빈곤의 문제를 여성 문제로 축소해서 보려는 겁니까?” “대학 교육까지 받고 좋은 옷 입고 좋은 신발 신으면서 희영이 같은 여자랍시고 그 문제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희영이 말했다. “여성 문제는 그렇게 작은 문제라고 생각해요?”
이 일 뒤로 정윤과 희영은 서로 외면한다. 희영은 대학 졸업 뒤 기지촌 활동가로 살아간다. 희영은 “타인의 상처에 대해 깊이 공감”하고, “상처의 조건에 대한 직관”을 지닌 이다. “읽고 쓰는 것만으로 나는 어느 정도 내 몫을 했다, 하고 부채감 털어버리고 사는 사람들” “부정의를 비판하는 것만으로 자신이 정의롭다는 느낌을 얻고 영영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이 되려 하지 않은 희영에겐 당연한 진로였다.
최은영의 소설집 여러 단편은 읽기와 쓰기를 다룬다. 읽고 쓰는 주체가 여성일 때 벌어지는 일, 여성이 사회 문제에 관해 읽고 쓸 때 겪어야 하는 일들 말이다. 소설집 표제작이자 2020년 젊은작가상 수상작인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에서도 여성의 글쓰기가 화두로 나온다.
2009년 2학기 희원(나)은 스물일곱의 대학교 3학년 학사 편입생이었다. 또 “누군가에게 나는 비정규직 은행원이었고, 누군가에게는 다이어트가 필요한 어린 여자애였으며, 누군가에게는 일을 처리해줄 기계”였다.
희원은 수업 중 월경으로 생긴 곤란한 일을 도와준 대학 강사와 친해진다. 둘의 공통점은 용산이라는 공간이었다. 강사의 에세이집 중 한 단락은 다음과 같다. “나는 그곳을 언제나 떠나고 싶었지만, 내가 떠나기도 전에 내가 깃들었던 모든 곳이 먼저 나를 떠났다. 나는 그렇게 타의로 용산을 떠난 셈이 되었다.” 이 강사는 대학원 가기 전까지 용산에서 계속 살았다.
희원의 집은 ‘그 건물’(용산참사가 벌어진 남일당)에서 20분 거리였다. 아빠는 “건물주가 나가라면 나가야지. 어디 도시 한복판에서 행패야”, 엄마는 “그 사람들이 어떻게 됐든 그게 나랑 무슨 관곈데? 우리 먹고살기도 빠듯해 죽겠다”, 오빠는 “태어날 때 가난한 건 죄가 아니지만, 죽을 때 가난한 건 자기 죄야”라고 했다. 희원만 혼자 울었다.
두 사람은 참사 당일 새벽 각자 무엇을 했는지 이야기를 나눈다. 희원은 전날 마신 술 때문에 누워 잤고, 강사는 소논문을 썼다. “같은 시간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 때 책상에 앉아서 논문을 쓰고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누군가는 자신의 마음에 상처를 낼 수 있다는 걸 나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이해했다.”
학기가 끝날 무렵 희원은 은행에 다니던 시절 걸어다니던 길에 관한 ‘통근’이란 제목의 에세이를 써 수업 때 발표한다. 글 후반부에 비어버린 건물, 비어버린 상가들을 이야기하며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이란 문장을 반복해 썼다.
폭력 시위가 문제라는 둥 여러 반론이 나왔다. 누군가 말했다. “그게 경찰특공대에 철거 용역까지 투입할 상황이었나요. 시위대가 폭력적이라고요? 고작 이천오백만원 던져주면서 나가라고 하면 저항도 못하고 끌려나가야 하나요? 정말 그렇게 믿어요? 그 정도의 잔인함이 옳다고?” 그 수업이 9년이 지난 뒤에도 “잔인함을 잔인함이라고 말하고, 저항을 저항이라고 소리 내어” 말하던 사람을 기억한다. “누군가가 내가 느꼈던 감정과 생각을 날것 그대로 말하는 모습을 보며 한편으로는 덜 외로워졌지만,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그럴 수 없었던. 그러지 않았던 내 비겁함을 동시에 응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간 자기 글쓰기에 관해서도 생각한다. “편향된 관점을 지녔다고 비판받을까 봐 두려워서 나는 안전한 글쓰기를 택했다. 더 용감해질 수 없었다.” 강사는 “글쓰기는 의심하지 않는 순응주의와는 반대되는 행위”라고 말한다.
최은영은 소설집에서 여성주의 관점을 견지한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에서 몇몇 학생은 ‘젊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강사에게 무례를 범한다. ‘답신’에서 자매가 종이 왕관을 서로에게 씌워주며 미스코리아대회 놀이를 할 때 아빠는 이렇게 혼냈다. “부끄럽지도 않아? 그런 고급 창녀가 되고 싶은 거냐?” 이 단편은 언니 남편의 불륜과 가정 폭력 문을 아우르며 가부장제 문제를 환기한다.
돌봄과 이주여성 문제도 나온다. ‘사라지지, 사라지지 않는’에선 기남이 미국 유학 시절 재미교포 제임스와 결혼한 뒤 지금 홍콩에 사는 딸 우경네 집에 간다. 이곳에서 숙식하며 헬퍼 일을 하는 제인을 만난다. 기남은 제인이 뭐 갖다줄 때면 ‘땡큐 땡큐’하고, 설거지도 하려 했다. 이런 기남을 우경은 타박한다. 기남이 귀걸이를 잃어버리자 우경은 제인을 의심한다. 제인이 집 밖에 나가자 바로 방을 뒤진다. 기남은 일곱 식구를 둔 권사장네 집 부엌 옆 추웠던 방을 떠올린다. 아홉살 때부터 이 집에서 식모살이했다. 권사장네 식구들은 썩은 과일도 기남 손에 쥐여주지 않고, 월급도 주지 않았다.
소설집은 상처와 치유, 관계 회복, 공감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몫’ 마지막 부분에서 ‘먼저 다가가기’라는 의미를 생각한다. 세 사람의 관계가 흔들린 뒤 오랜 시간이 지났다. 희영을 마지막으로 본 기억을 떠올리며 어깨를 흔들거리던 정윤에게 해진이 가까이 간다. “무엇이 지나가고, 무엇이 그대로인지 아직은 알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그녀가 당신의 품에 기댈 수 있도록, 당신은 정윤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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