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의 전설[살며 생각하며]
벼락 맞은 마을 대추나무 사연
납량특집에서나 볼 법한 ‘전설’
고향 이야기는 낭만의 그 자체
상상의 세계로 가는 비밀통로
요즘 떠도는 괴담, 殺氣만 가득
최소한 낭만이라도 갖췄으면…
자신이 태어나서 자란 곳으로, 조상 대대로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가문의 역사가 서린 장소를 고향이라고 한다. 타관 땅에서 사는 사람들 가슴 한쪽에는 늘 고향을 향한 그리움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다. 몸이 아프거나, 사는 게 힘들거나, 분하거나 억울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꿈을 키우며 뛰놀던 고향의 모습이다. 그래서 고향은 어머니의 포근한 가슴이기도 하다.
나 역시 어머니께서 공부를 시키기 위해 도시로 전학시키시는 통에, 11살에 고향인 경남 의령(宜寧)을 떠났다. 그리고 17년이 지나서야 처음으로 고향을 찾았다. 의령군 지정면 두곡리 773번지, 안락한 초가집에 다다르자마자 내가 공부하고 잠자던 방문을 열어보았다. “응? 내가 이렇게 작은 방에서 살았단 말이야?” 아, 방이 작아진 게 아니라 내가 훌쩍 커버린 것이구나! 팔베개하고 누워 천장을 바라보노라니, 전설 같은 옛이야기들이 요지경처럼 펼쳐졌다.
일제강점기 시절, 일곱 살 소년이던 아버지는 재 너머 이모님 댁으로 심부름을 나섰단다. 지리산 자락의 끝인지라 서재골은 골짜기가 깊어 새벽의 고요함을 더했다. 그런데 어디선가 “쉭! 쉭! 쉭!” 소리가 들려 바라보니 고구마밭에 며칠 전에 설치된 묘(墓) 앞에서 흙이 솟구치고 있었다. 소년은 짱돌을 집어 들고 살금살금 다가갔다. 갑자기 무언가가 땅속에서 튀어나와 허공에 빙그르르 한 바퀴 공중제비를 돌더니, 소년 앞에 앞다리를 턱 하니 버티고 앉아 소년을 날카롭게 쏘아보는 것이었다.
“뭐야? 개 아냐?” 생긴 게 분명 개였다. 그런데 주둥이가 뾰쪽하게 생긴 것이 꼬리는 또 왜 그렇게 뭉툭하고 긴지…. 그 개에게는 참으로 예의 없는 말이지만, 생겨도 정말 못생겼더란다. 아마 며칠 전에 설치된 분묘에서 뭔가 먹을 것을 찾으려고 흙을 파고 있었던 것 같았다. ‘넌 오늘 주민등록 말소 날이다.’ 소년은 짱돌 하나를 날렸다. 정확히 정수리를 맞히나 싶던 순간, 개는 공중으로 솟아오르더니 ‘캥∼∼’하고 소림사 36방보다 더 유연한 몸놀림으로 피하는 게 아닌가? 소년은 개를 따라가며 계속 짱돌을 날렸다. 그렇게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한동안 펼쳐지는 사이, 소년은 이모님 댁과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다른 산의 중턱으로 와 버린 소년은 발이 가시나무에 긁혀 선혈이 낭자하고 몹시 쓰리고 아팠다.
그제야 정신을 차려보니 지정면 삼산리에 있는 커다란 저수지 위의 절벽에, 떨어지기 일보 직전으로 아찔하게 소년은 서 있었다. 그랬다. 소년은 개를 잡으려 쫓아다녔지만, 개는 소년을 절벽으로 유인하려고 이리저리 끌고 다녔던 것이다. 그런데 그놈은 개가 아니라 여우였다.
내가 열 살이던 어느 날, 초등학교에서 하교하자마자 동네 아이들과 함께 소를 몰고 꼴을 먹이러 지리산 자락의 고봉이 있는 산으로 올라갔다. 소를 산에 풀어 놓은 후 아이들은 진 짓기 놀이에 푹 빠져들었다. 그때 서쪽 하늘이 갑자기 컴컴해지더니 이내 천둥 번개가 세상을 뒤집을 듯 하늘을 갈라놓고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소나기가 쏟아졌다. 우리는 각자 소를 찾아 집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우리 소 ‘미영이’만 찾을 수 없었다. 나는 이쪽저쪽 뛰어다니며 미영이를 불렀다.
어느 순간 “딸랑 딸랑” 워낭 소리가 들렸다. 반가움에 뛰어갔다. 그런데 미영이는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는 산등성이 너머에서 “딸랑 딸랑”, 아니 그쪽이 아니다. 산의 한 폭을 건너 ‘애기장골’에서 “딸랑 딸랑”, 여기서 “딸랑 딸랑” 저기서 “딸랑 딸랑”. 그러나 그 어디에도 미영이는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내 눈에 벼락 맞은 대추나무가 들어왔다. 그 순간 할아버지께서 들려주신 이야기가 떠올랐다.
1590년 어느 날, 남해안의 어느 어촌 마을에 낯선 남자가 파도에 밀려왔다. 사람들은 조선을 염탐하러 온 밀정(密偵)이었던 그 일본인을 극진히 간호하여 일본으로 돌려보냈다. 2년 후 일본은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그 밀정도 조선으로 왔는데, 따뜻한 인정을 잊을 수 없었다. 함안을 거쳐 의령으로 일본군들이 진격 작전을 짜고 있을 때, 그 밀정은 몰래 부대를 빠져나와 의병장 곽재우(郭再祐)가 있는 의령군으로 말을 몰았다. 진격로를 미리 알려주려 했음이다. 그런데 적으로 오인한 의병들은 그에게 화살을 날렸다. 붉은 피를 흘리며 쓰러져 간 자리에 대추나무가 자라났고, 몇백 년이 지난 어느 날, 벼락이 치더니 대추나무가 불탔다. 그날 이후로 비만 오면 말의 목에 매었던 워낭 소리가 “딸랑 딸랑” 온 산에 메아리로 울려 퍼진다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가 떠오른 순간 나는 3만3000V 전기에 감전된 듯한 전율을 느낌과 동시에 ‘다리야 나 살려라’ 하고 집으로 뛰기 시작했다. 얼마나 놀랐던지, 동네 어른의 증언으로는 내가 산에서 그 높은 나무들 위로 날아서 내려오더라는 것이다. 그때 올림픽 높이뛰기 선수로 나갔더라면 금메달을 한 트럭 분쯤은 싣고 왔을 텐데, 출전하지 않은 것이 두고두고 후회스럽다.
고향이 참 좋다는 것이 이런 것이다. 납량 특집에서나 만날 전설 같은 이야기들이 내 숨결 속에 살아 있고, 은하 세계와 같은 상상의 세계로 들어가는 비밀통로를 열어준다. 낭만 그 자체가 고향 이야기이다.
요즘 무슨 괴담, 무슨 괴담 하면서 밑도 끝도 없는 괴이한 이야기들이 떠돌아다닌다. 하나같이 재미도 없고 따뜻한 인정도 없고 의리는커녕 낭만도 없는, 오로지 살기(殺氣)만 날카로운 이야기들이다. 괴담, 곧 등골 오싹한 이야기가 되려면 교훈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낭만이라도 있는 전설 정도의 품격은 갖춰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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