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 없었다면 케네디도, 워터게이트도 없었다” 현대사 바꾼 섬나라 청년들
솔로몬제도는 남태평양 미중 패권다툼의 최전선
이런 상상을 한 번 해보자. 미국의 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라는 존재가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그가 대선에 출마했던 1960년 대선에서 다른 사람이 민주당 대선후보가 됐을 것이다. 젊음과 패기를 앞세운 케네디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공화당 정부에서 부통령을 지낸 관록의 리처드 닉슨과의 이미지 대결에서 완승한 바 있다. 그 자리에 케네디가 아닌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승부의 추는 닉슨 쪽으로 기울었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
그래서 닉슨이 이겨 원래보다 8년 일찍인 1961년 취임했다면, 미·중 데탕트 시대를 연 중국 방문, 워터게이트 사건도 없던 일이 됐을 수도 있다. 현재 세계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됐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충분이 그런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1943년 8월 솔로몬 제도 원주민 청년 비아쿠 가사와 에로니 쿠마나가 배를 잃고 조난당한 미군들을 발견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당시 해군장교 존 F 케네디가 함장이었던 PT-109는 일본 구축함에게 들이받혀 침몰하고 있었다. 케네디와 승조원들이 미군 품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준 생명의 은인이 바로 가사와 쿠마나였다.
두 사람이 지금의 현대사를 쓴 주인공이라고 해도 전혀 과언이 아니다. 지난 1일은 케네디가 죽다 살아났던 P-109 어뢰정 피격 80주년 되는 날이었다. 이를 기념하는 케네디가의 보은 이벤트가 열려 눈길을 끈다. 케네디 대통령의 유일한 생존 자녀인 캐럴라인 케네디(66) 주 호주 미국 대사가 자신의 아들, 즉 케네디의 외손자인 잭 슈로스버그(30)와 함께 1일 솔로몬제도를 방문했다. 존 F 케네디의 목숨을 구해준 두 원주민 청년의 후손들을 만나기 위해서다.
가사와 쿠마나는 각각 2005년과 2014년 세상을 떠났지만, 유족과 후손들은 여전히 고향을 지키고 있었고, 케네디 대사 모자(母子)를 반겼다. 케네디 대사는 호주 주재 미국 대사관 공식 페이스북 계정을 통해 절절한 고마움을 표했다. “태평양 전쟁 당시 목숨바쳐 헌신했던 솔로몬 제도 주민들에게 우리는 정말 많은 신세를 졌습니다. 특히 우리 집안(케네디가)과 저는 바이아쿠 가사와 에로니 쿠마나 두분의 많은 빚을 지고 있습니다. 두 분께서 우리 아버지 목숨을 구해주셨으니까요.”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우리 아들과 저는 여러분의 아버지들께서 80년전에 하신 일에 대해 감사할 수 있게 돼 영광입니다. 우리 아버지는 그분들의 용기 덕분에 살 수 있었으니까요. 그분들은 또한 자유를 위한 싸움에서 조국을 위해 헌신하셨습니다.” 당시 존 F 케네디 등이 탔던 PT-109가 일본군에 피격되면서 승조원 2명은 목숨을 잃었다. 함장 케네디는 나머지 승조원들을 이끌고 물살을 헤쳐 가까스로 인근 섬에 다다랐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으나 꼼짝없이 조난당한 존 F 케네디 일행을 찾아낸 것이, 당시 호주군 정찰대원으로 활동하던 가사와 쿠마나였던 것이다. 그들의 정찰이 없었으면 이후 미국 대통령이 된 존 F 케네디의 딸과 외손자가 이곳으로 감사 인사를 오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케네디 대사 모자는 주민들과 일일이 담소를 나눴다. 또한 당시 존 F 케네디가 배를 빠져나와 필사적으로 수영했던 물길에서 80년전 상황을 재현해 수영도 했다. 그 물길에 있는 섬 중 하나인 플럼 푸딩 섬은 이제 케네디 섬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나와 아들이 이렇게 하는 건, 우리 아버지와 그의 휘하 군인들, 그리고 이들을 구해준 솔로몬 제도 주민들에게 특별한 감사의 표시를 하는 것”이라고 케네디 대사는 말했다. 이번 방문은 케네디가(家)의 내력이 깃든 사적 일정처럼 보이지만, 실은 엄중한 현안을 담은 핵심 외교 일정이기도 하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진영과 중국은 최근 전략적 요충지인 남태평양에서 세력 확장을 위한 총성없는 외교전쟁을 벌이고 있는데 그 최전선이 바로 솔로몬제도이기 때문이다. 솔로몬제도는 면적은 한반도의 8분의 1이고, 인구는 70만명이 조금 넘는다.
태평양 전쟁 당시 최대 격전지 중 한 곳으로 일본군이 일시 점령했다 미국·호주군에 격퇴됐다. 1978년 영연방의 일원으로 독립한 뒤 서방의 영향력 하에 있었지만, 21세기 들어 중국이 급속도로 세력을 키웠다. 솔로몬제도는 2019년 오랜 수교국 대만과 단교하고 중국과 수교했다. 특히 2022년 4월 중국과 안보협정을 체결하면서 열강 패권 다툼의 발화점이 됐다. 미국·호주·뉴질랜드 등은 일제히 중국이 솔로몬제도를 통해 자국 병력을 남태평양에 진출시킬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잔뜩 긴장했다. 특히 미국은 1993년에 폐쇄했던 솔로몬제도 주재 대사관을 30년만에 전격 부활시켰을 정도로 솔로문제도 외교에 공을 들이고 있다. 이런 연장선상에서 어뢰정 피격 80주년을 계기로 존 F 케네디의 딸이 솔로몬제도로 날아간 것이다.
케네디 대사는 솔로몬제도 관문도시 중하나인 기조의 초등학교를 찾아 80년전 호주군 정찰대원이었던 솔로몬제도인이 훗날 미국 대통령이 된 해군장교와 군인들의 목숨을 구해준 이야기를 꺼내며 세 나라의 각별한 관계를 강조했다. 케네디 대사는 미국의 대표적인 정치명문가인 케네디가의 여러 멤버들 중에서도 ‘존 F 케네디의 딸’이라는 독보적 정치적 자산을 갖고 있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서 일본 주재 대사를 지낸데 이어 바이든 행정부에서는 호주 주재 대사로 낙점됐다. 호주 주재 미국 대사관 소셜미디어에 게재된 이번 일정 사진 중에는 케네디 대사 못지 않게 아들 슈로스버그의 비중도 컸다. 케네디가의 핵심 중 핵심인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의 외손자인 그를 차세대 정치인으로 널리 알리려는 의도가 있지 않나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대통령(존 F 케네디)과 연방 법무장관(로버트 케네디) 등을 잇따라 배출했던 케네디가문은 암살 등 비극적 스토리 때문에 미국 뿐 아니라 전세계의 관심이 끊이지 않는다. 그 후손들은 지금도 미국 정치권에서 활동하고 있다. 로버트 케네디의 아들인 로버트 케네디 주니어(69)는 현직 조 바이든 대통령이 사실상 확정적인 민주당 대선 경선 주자로 거론되고 있다. 그의 조카, 즉 로버트 케네디의 손자인 조 케네디 3세(43)는 연방 하원의원을 거쳐 국무부 북아일랜드 특사로 활동하고 있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