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삶은 결코 작지 않다 [책&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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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런던 변두리 지역의 한 신문사에 '남자와 아무런 관계없이' 딸을 낳았다고 주장하는 이상한 편지가 도착한다.
진은 그레첸 가족의 환대를 받으며 서서히 이들의 친구가 되는데, 어린 마거릿에게 '비공식 이모'가 되어 유사 모녀 관계를 경험하고 하워드와는 과거의 실패한 연애와 낙태 사실을 고백할 정도의 우정과 아슬아슬한 사랑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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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몰 플레저
클레어 챔버스 지음, 허진 옮김 l 다람(2022)
1957년 런던 변두리 지역의 한 신문사에 ‘남자와 아무런 관계없이’ 딸을 낳았다고 주장하는 이상한 편지가 도착한다. ‘희고 부드러운 손을 유지하려면 레몬 껍질의 하얀 부분에 손톱을 찔러 넣어라’와 같은 소소한 생활 정보 기사를 쓰는 기자 진은 망상이나 사기극으로 의심될 법한 ‘처녀생식’ 주장의 진위를 알아보기 위해 취재에 나선다. 진이 직접 만나본 그레첸은 자신의 아름다운 외모를 똑 닮은 딸 마거릿과 남편 하워드와 함께 완벽에 가까운 가정을 꾸려나가고 있다. 진은 취재를 통해 그레첸이 십 대 시절 심각한 관절 류머티즘으로 요양원에 입원했을 때 임신했다는 것, 당시 요양원은 여성 환자와 여성 간호사, 수녀들만 있었고 남성은 가족이라도 철저히 출입을 통제당했다는 것, 4인용 병실에 그레첸 혼자 있었던 때는 단 한순간도 없었고 혼자서는 움직일 수도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더욱이 ‘처녀 잉태’ 진위를 알아내고자 하는 의사들의 여러 검사를 통해 그레첸의 주장이 거짓이라고 반박할 근거는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괴팍하고 경계심 많은 늙은 어머니와 단둘이 살아가는 ‘노처녀’ 진은 서로를 깊이 사랑하고 의지하는 그레첸 가족을 보며 부러움을 느끼고 어느새 믿기 힘든 그레첸의 주장을 믿고만 싶어진다. 진은 그레첸 가족의 환대를 받으며 서서히 이들의 친구가 되는데, 어린 마거릿에게 ‘비공식 이모’가 되어 유사 모녀 관계를 경험하고 하워드와는 과거의 실패한 연애와 낙태 사실을 고백할 정도의 우정과 아슬아슬한 사랑을 느끼게 된다. 사실 진의 취재 과정은 완벽해 보이는 그레첸 가족에 스며들어 기존 질서를 뒤흔들고 전혀 새로운 관계들의 이합집산으로 번지는 기폭제가 된다.
언뜻 미스터리로 보이는 소설 안에는 다양한 여성의 삶과 관계가 교차한다. 딸의 삶을 단속하면서 동시에 심각하게 의존하는 진의 어머니와 진의 관계는 벗어나고 싶은 욕망과 죄책감이라는 양가감정을 자극한다. 서로를 똑 닮은 ‘천사 같은’ 그레첸과 마거릿 모녀의 모습은 깊은 물속에서 일렁이다 이따금 제 모습을 반짝 드러내는 불온과 불안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타인과 타인으로 만났지만 상대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큰 행복을 희생할 수 있을 정도로 발전한 진과 마거릿의 유사 모녀 관계도 있다. 또 흔히 ‘사랑’이라고 부르는 성애적 관계 역시 다양하게 등장하는데, 우선 ‘기적’을 믿는 그레첸과 하워드의 이성애 부부관계, 뒤늦게 만났지만 서로를 깊이 신뢰하고 우애하는 진과 하워드의 연인관계, 그리고 그레첸이 남몰래 숨겨왔던 ‘특별한’ 사랑의 관계가 있다.
소설의 전반적인 구조는 오늘날의 과학과 사회적 의식으로 보면 언뜻 이해가 안 되는 ‘처녀생식’의 진위를 헤쳐가는 미스터리 기법으로 이루어졌지만, 소설 중반 이후의 큰 반전과 마지막의 더 큰 반전, 그리고 충격적인 결말로 이어지는 굵직한 서사의 틀 안에 ‘작은 즐거움’이라는 소설 제목처럼 소소해 보이지만 결코 사소하지 않은 여성 서사의 여러 단면을 섬세하게 포착해두었다. ‘누가 했는가’에서 ‘왜 했는가’로 발전해간 미스터리의 초점이 ‘어떻게 살아갔는가’로 확장되면서 흡인력 강한 이야기 하나를 완성해낸다. 그러니 이 ‘작은 즐거움’을 읽는 기쁨과 이후의 여운은 결코 작지 않다.
이주혜 소설가·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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