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일성에도 차이에도 머무르지 마라 [책&생각]
서양의 유구한 ‘동일성 사유’ 비판
지식의 기초
수와 인류의 3000년 과학철학사
데이비드 니런버그‧리카도 니런버그 지음 , 이승희 옮김 l 아르테 l 3만 8000원
서양의 사유 특성으로 흔히 수학적 사유가 거론된다. 수학의 엄격한 논리적 사유가 서양의 전통 철학을 낳았고 이 철학에 기초해 근대 물리학이 탄생했으며 물리학의 수리적 사유가 모델이 돼 다른 분과 학문들의 과학적 사유를 이끌었다는 것이다.
요컨대, 수학과 논리학의 사유 형식이 근대 유럽의 세계지배를 떠받친 정신적 힘이었다. 이 수리논리적 사유를 ‘동일성 사유’라고도 부를 수 있는데, ‘지식의 기초’는 이 동일성 사유의 역사를 드넓게 조망하는 책이다. 이 책을 함께 쓴 데이비드 니런버그와 리카도 니런버그는 부자 사이다. 미국 시카고대학 교수인 아들 데이비드는 신학과 역사학에 정통한 학자이며, 아버지 리카도는 수학자다. 두 사람은 협업을 통해 3000년에 걸친 서양 ‘동일성 사유’의 역사를 수학‧철학‧종교‧역사‧과학‧문학을 관통해 개관한다.
지은이들이 동일성 사유에 승리의 월계관을 씌워주려고 이 사유를 검토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사유가 가져온 파괴적 결과에 주목함으로써 동일성 사유의 완고한 틀을 깨뜨리는 데 이 책의 목표가 있다. 바꿔 말하면, 서양 사유의 바탕에 깔린 ‘동일성의 사유 문법’을 해부함으로써 그 무의식을 의식화하고, 그리하여 동일성의 사유 문법에 함몰됐을 때 빚어지는 사태를 보여주는 것이 이 책의 관심사다. 이런 생각을 지은이들이 처음 한 것은 아니다.
이 책은 서양 사유의 문법을 깊숙이 탐사한 사람으로 ‘서구의 몰락’을 쓴 독일 문화철학자 오스발트 슈펭글러(1880~1936)를 거명한다. 슈펭글러가 그 책을 출간한 것은 제1차 세계대전이 막 끝나던 시점이었다. 수백만명의 젊은이들이 무참히 죽어간 그 전쟁에서 슈펭글러는 서양의 몰락을 보았는데, 그 몰락의 원인으로 슈펭글러가 지목한 것이 ‘이성의 독재’였다. 이성의 독재란 다른 말로 하면 ‘수학의 독재’인데, 수학의 엄격한 논리적 사유가 서구의 정신을 지배하고 그 정신이 유럽 문명을 일으켜 끝내 세계대전이라는 참화를 낳았다는 것이다. 슈펭글러는 근대 유럽 문명의 정신을 ‘파우스트적 영혼’에 빗대기도 했다. 파우스트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지식을 얻었듯이 유럽 문명도 영혼을 내주고 수학을 얻었으며, 그 수학이 유럽에 영광을 안겨줌과 동시에 유럽을 파멸로 이끌고 간다는 진단이었다. 이런 생각은 슈펭글러만 한 것이 아니었다. 동시대의 로베르트 무질은 소설 ‘특성 없는 남자’에서 수학이 “인간을 지상의 주인으로 만드는 동시에 기계들의 노예로 만들기도 하는 악마적 지식의 원천”이라고 썼다.
슈펭글러와 무질이 비판한 수학이야말로 동일성 사유의 기원이자 전형이다. 수학은 수의 동일성에서 시작해 모든 것을 동일성의 관계로 풀어냄으로써 우주의 비밀을 해명한다. ‘2+2=4’라는 정식을 보자. 2라는 수가 동일성을 잃고 1이나 3이 되면 이 정식은 무너진다. 또 이 정식 자체가 ‘2+2’와 ‘4’가 동일하다는 것을 뜻한다.
수학은 불변하는 동일자들의 관계를 통해서 세계의 영원한 질서를 찾아낸다. 이 수학적 동일성 사유는 기원전 6세기 그리스의 피타고라스학파에서 확립됐으며, 파르메니데스를 거쳐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로 이어졌다. 플라톤은 지상의 변화무쌍한 세계를 부정하고 그 원본이 되는 천상의 영원한 동일자 세계를 상정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우주 운행의 맨 처음에 놓인 제일원인 곧 ‘부동의 원동자’라는 원초적 동일자를 사유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이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사유가 서양의 종교‧철학 사유를 지배했고 그 사유에서 근대 과학이 탄생했다. 슈펭글러 시대의 많은 지식인들이 이 수학적 동일성 사유를 극복하지 않으면 인류의 파멸은 피할 수 없다고 보았다. 현상학의 창시자 에드문트 후설은 ‘유럽 학문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에서 갈릴레이 이후 수학적 이성이 패권을 장악해 유럽 학문을 위기로 몰아넣었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슈펭글러 시대에 동일성 사유에 대한 비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지은이들이 주목하는 것은 그 시대에 ‘사유 문법’을 둘러싸고 거대한 세계관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수학자들 가운데 다수는 슈펭글러식 동일성 비판 혹은 이성 비판이야말로 서양을 위기로 몰아넣는다고 보았다. 프레게와 러셀이 대표적이다. 두 사람은 논리와 이성이 지나쳐서가 아니라 부족한 탓에 이 모든 재난이 닥쳤다고 보았다. 세계관의 충돌은 이론 싸움에 그치지 않았다. 이 책은 수리물리학자이자 사회주의자였던 프리드리히 아들러가 1916년 오스트리아 총리를 암살한 사건을 사례로 든다. 아들러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등장과 함께 우주가 새로운 수학적 질서에 놓이게 됐다는 사실이 자신의 정치적 암살 행위를 정당화한다고 주장했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논리실증주의의 지도자였던 모리츠 슐리크가 1936년 뮌헨대학에서 옛 제자에게 살해당한 사건이 그것이다. 법정에서 그 제자는 슐리크의 논리주의 사상이 자신의 도덕적 판단력과 자제력을 빼앗았다고 주장했다.
이 책이 동일성 사유를 집요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동일성의 반대편에 선 차이(다름)를 무작정 찬양하는 것은 아니다. 동일성의 사유든 차이의 사유든 극단에 치우치면 온전한 사유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 지은이들 주장의 핵심이다. 그런 생각을 이 책은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1871~1945)의 시를 빌려 이야기한다. 1940년 발레리는 이렇게 썼다. “모든 다른 것은 같다. 모든 같은 것은 다르다./ 너의 정신 안에서 이 두 가지 원리 사이를 오가라. 그러면 너는 이 두 원리가 모순되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 시를 두고 지은이들은 “동일성과 차이 사이의 선택에서 경탄스러운 비독단적 가능성을 보여주었다”고 평한다. 이 책은 그런 비독단적 태도를 음악 연주에 견주어 설명하기도 한다. 협주곡이 성공하려면 악기마다 고유한 소리를 내야 한다. 다시 말해 동일성을 지켜야 한다. 동시에 악기들은 다른 악기들의 소리에 민감하게 감응하고 거기에 맞춰야 한다. 곧, 자기를 열고 차이를, 다름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 둘이 함께할 때 음악은 온전해진다. 동일성과 차이의 이 동시성을 아는 것이야말로 앎의 기초이며 지혜에 이르는 길이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 신림역 이어 서현역 흉기난동…“길 걷는 것도 두렵다”
- 주말 내내 35도 ‘불볕더위’…강릉 30.7도 ‘초열대야’ 관측
- 윤 대통령 “잼버리에 냉방버스·냉동탑차 무제한 공급” 지시
- ‘50억 클럽’ 박영수 전 특검 구속…법원 “증거인멸 우려”
- [단독] 급발진 사고 입증 열쇠될까?…‘브레이크 압력’ 기록 남긴다
- “에스컬레이터 선 남자, 갑자기 흉기 꺼내 보안요원부터 찔러”
- “노인 대표로 뺨 때리겠다”…사과하러 온 김은경 사진에 따귀
- [단독] 수사기관 제공된 통화내역 건수 들쭉날쭉…“개입 의심”
- ‘한여름의 악몽’ 돼버린 잼버리…조직위는 “문제없다” 되풀이만
- 철근 누락 부른 ‘로타리팀’과 ‘판떼기 관행’…숙련공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