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남편에게 말했다, 화분들만은 죽이지 말아 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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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전 야학에서 '대학생 선생님'과 '어린 공순이'로 만난 양순덕 부부는 여전히 서로 존대한다.
둘 사이 아이도 없어 더 애틋할 법하다, 면 순덕의 기가 찰 것이다.
"우리 선생님은 배운 분답게 여편네에게 꼬박꼬박 존댓말을 하시지만, 내가 어쩌다 밥이라도 태우면 어린 계집애 다루듯 회초리로 제 종아리를 찰싹찰싹 때린답니다!" 자식마냥 애지중지하는 식물들이 잎을 부르르 떨 만큼 순덕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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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기담: 순한맛
이주혜·정선임·범유진·전예진 지음 l 읻다 l 1만4500원
40년 전 야학에서 ‘대학생 선생님’과 ‘어린 공순이’로 만난 양순덕 부부는 여전히 서로 존대한다. 둘 사이 아이도 없어 더 애틋할 법하다, 면 순덕의 기가 찰 것이다. 석달 시한부 선고를 받은 순덕은 이제라도 폭로하고 싶다.
“우리 선생님은 배운 분답게 여편네에게 꼬박꼬박 존댓말을 하시지만, 내가 어쩌다 밥이라도 태우면 어린 계집애 다루듯 회초리로 제 종아리를 찰싹찰싹 때린답니다!” 자식마냥 애지중지하는 식물들이 잎을 부르르 떨 만큼 순덕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잔소리 회초리’를 말한 것이긴 하다. 주변 부부 모임에 아내 동반을 피하던 교장 남편의 퇴직 후 말본새는 더 고약해져 있었다.
이 실상을 보고 간 옛 공장친구 현자가 한밤중 쏟은 술주정. “…우리 양순덕이가 이 손현자의 유일한 자랑이었는데, 아이고, 그리 종년처럼 살고 있을 줄이야!…”순덕은 “부끄러운 아내로 죽을지언정 부끄러운 어머니로 죽고 싶지 않다는 생각”으로 남편에게 유언을 남긴다. “부디 화분들만은 죽이지 말아주세요….”
남편 박천일은 분노한다. 별다른 일탈도 없이 ‘아내의 교육’만 과업 삼아왔는데 덜컥 죽은데다 유서조차 불경하다. ‘다른 무엇을 죽인 적은 있단 말인가?’ 박천일이 아내를 죽이는 악몽은 이때부터였다. “네가 죽였다!”는 꿈속 저주에 내몰려 화초들을 챙겨보나 시들어갔다. 오뉴월 냉해까지 입은 것이다.
저주받은 집을 저렴하게 세 얻어 온 이는 영문학 강사 손우정이다. 대학 임용 공고에 지원했으나 탈락했다. 그를 치켜세웠던 모교 허 교수가 결과 발표 전 불러낸 자리에서 시도한 성추행을 뿌리친 뒤였다. 상처에 쫓겨 임차해 간 집에서 손우정은 마당 창고에 있던 공책을 보고 놀란다. 순덕이 직접 기록한 식물 돌보는 법이었는데, “거침없”는 말투에 “어느 문헌보다 생동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손우정은 적힌 대로 화초들을 돌본다. 하룻밤 지독한 폭우가 지나가고 환해진 창문 밖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는다. 초록의 손들이었다. 빨간 꽃도 돋았던가. 전날 폭우 예고에 손우정이 한 건 100개의 화분들에 눈 맞추며 한 마디 읊조린 것뿐이다. “우리 살아남자.”
소설집 ‘누의 자리’ 등에서 보듯 문학적 주술로 부재 ‘되어온’ 여자들을 불러 보듬고 잇대어 온 이주혜 작가의 단편 ‘초록 비가 내리는 집’이다. 양순덕이 죽어가는 손우정의 영혼을, 손우정이 죽은 양순덕의 언어를 되살리는 과정이 이다지도 경쾌하고 아름답다.
작품이 실린 ‘여름기담: 순한맛’은 계절 기획 소설집이다. 이주혜, 정선임, 범유진, 전예진 작가가 구성했다. “그날이 그날 같”은 직장인의 일상을 공포로 형상화한 ‘디 워’, 혐오의 도시에서 고양이가 된 애인을 찾아나서는 ‘아직은 고양이’ 등을 보면 공포는 8월의 한낮에도 후끈하겠다. ‘여름기담: 매운맛’(백민석·한은형·성혜령·성해나 작가)도 있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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