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층아파트 보며 한숨... '악귀' 김은희 작가 옛 모습이었다

양승준 2023. 8. 4. 0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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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귀 소재로 자살 뒤 '보이지 않는 손'... 청년 향한 '사회적 타살' 꼬집어
김은희 작가 "청년들이 힘들어하는 건 우리 기성세대 책임"
백성, 청년의 고단함에 집중한 작가
생활 어려웠던 보조작가 시절 떠올리며 '착한 임대 프로젝트' 실험
드라마 '악귀'에서 구산영(김태리)이 집에 악귀를 쫓는 새끼줄을 줄줄이 걸어 놓고 두려워하고 있다. SBS 제공

SBS 드라마 '악귀'에서 스스로 목을 매 숨진 이들의 양 손목엔 모두 시뻘건 멍이 들어 있다. 수사는 자살로 종결됐지만 모두 제 뜻대로 죽은 게 아니다. 악귀에 속수무책으로 제압당해 죽임을 당했다. 보이지 않는 힘(악귀)에 자살로 위장된 타살. '악귀'의 대본을 쓴 김은희 작가는 "자살한다는 게 그 사람이 잘못해서만은 아니고 누군가 혹은 무엇인가의 부추김, 다른 원인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란 생각을 악귀로 표현해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김은희 작가는 대본을 "머리보다 발로 쓰자는 주의"다. 그래서 드라마 만들 때 여러 전문가를 찾아간다. 다양한 세대와 여러 사람을 최대한 많이 만나야 현실적인 대본이 나온다고 믿는다. 감 작가는 "안 그러면 50대 아줌마의 이야기밖에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넷플릭스 제공
1030 사망원인 1위 '자살'... "보이지 않는 손 있어"

'악귀'는 민속 신앙을 소재로 억울하게 죽은 이들을 통해 어린이 살해 등 사회적 비극을 들춰 시청률 10%를 넘나들며 화제 속에 지난달 종방했다. 드라마에서 민속학자 염해상(오정세)은 한강대교를 바라보며 "자살 사건에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있어"라고 말한다. 보이지 않는 손에 죽임 당한 이들의 가해자는 악귀뿐 아니라 '기성세대'이기도 하다.

극 중 '장한' 고시텔에선 학비를 장만하기 위해 불법 사채업자에 돈을 빌렸던 대학생들이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난 탓에 빚 독촉에 협박당하다 목을 매고, 오른쪽 얼굴에 피멍이 든 고등학생 진욱은 학교 옥상에서 동급생들에게 "내가 죽으면 우리 집에 꼭 와 줘"라고 말한 뒤 스스로 뛰어내려 가정폭력을 죽음으로 고발한다. 통계청이 지난해 발표한 '2021 사망 원인 통계'에 따르면 10~30대 사망 원인 1위는 자살이다. "'어려웠던 시절 사람들은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발버둥 쳤는데 그때보다 훨씬 살기 좋아졌다는 지금 우리 청년들은 왜 죽으려 할까'라는 질문"('악귀' 제작 총괄 이옥규 스튜디오S 책임프로듀서)에서 출발해 김 작가는 악귀를 소재로 청년을 향한 사회적 타살을 고발했다. "기성세대는 살아왔던 인생을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거고 지금 청년들이 살기 힘든 사회를 만든 건 우리, 기성세대의 책임이라고 생각해요. 한창 아름다워야 할 청년들이 왜 이렇게 힘들어하는지를 기사 등을 통해 접하면서 마음이 아팠거든요." 김 작가의 말이다. '악귀'에선

마을 그리고 누군가의 부를 위해 아이들이 희생된다. "아이들의 죽음은 언제나 마음이 아프죠. 그 아이들에게 있었을 수많은 기회와 시간, 희망을 모두 빼앗긴 거잖아요. 그래서 (어려서 죽은) 태자귀와 염매 기록을 보고 드라마에 녹여보자 생각했죠."

드라마 '악귀'에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산영(김태리)의 친구 세미(양혜지)는 고층아파트를 바라보며 "힘든 일도 저런 데서 겪고 싶다"고 말한다. 그는 지하 단칸 셋방에 살고 있다. SBS 방송 캡처
고층 아파트 보며 한숨... 신혼 때 가스비도 제때 못 낸 작가

드라마에서 악귀에 씐 주인공 구산영(김태리)은 취업 준비를 하면서 대리운전으로 학비를 버는 공시생이다. 지하 셋방에 살며 산영과 함께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세미(양혜지)는 동네 반대편 우뚝 선 고층 아파트를 보며 이렇게 말한다. "저런데 살아도 힘든 일은 있겠지? 근데 힘든 일도 저런 데서 겪고 싶다. 그럼 좀 행복하게 불행할 수 있을 거 같아." 이 장면이 방송된 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엔 '가난해 보지 않았으면 쓸 수 없는 대사 같아서 좋으면서 슬펐다' 등의 글이 올라왔다. 이 장면은 김 작가의 경험에서 나왔다.

"저도 어렸을 때 말 그대로 찢어지게 가난했었어요. 그때 살았던 곳이 서울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인왕산이었죠. 사춘기 때 집에 들어가긴 싫고 주변을 배회하다 시내쪽의 불빛을 내려다보면서 그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아마도 요즘 친구들도 저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겠지라는 생각으로 대사로 넣어봤습니다. 저도 그땐 청춘이었으니까요."

드라마 '킹덤'에서 굶주림에 허덕인 백성들은 좀비가 된다. 넷플릭스 제공

드라마 '싸인'(2011) '시그널'(2016) '킹덤' 시리즈(2019~2022) 등을 줄줄이 성공시키며 한국 스릴러의 간판 작가로 떠오르기 전까지 김 작가의 삶도 고단했다. 1998년 장항준 감독과 결혼한 김 작가는 신혼 초 도시가스비도 제때 못 냈다. "(가수) 윤종신이 쌀뿐만 아니라 세제 등 살림 물품을 사주며 도와주던 때"(장 감독)다. '악귀'에서 산영은 고등학교에서 다른 학생들이 농구를 하고 떠나면 그 운동장에 쭈그려 앉아 떨어진 동전을 줍는다. 김 작가는 농구 명문 휘문고 출신 남편한테 들은 그의 학창 시절 경험담을 '악귀'에 녹였다. '짠내' 나던 청년 시절을 통과한 김 작가는 그렇게 직·간접적으로 접한 '흙냄새' 나는 일상의 풍경과 문제의식을 차곡차곡 쌓아 서민의 절망을 다룬 드라마의 재료로 썼다. '악귀'를 비롯해 조선시대 백성의 굶주림을 좀비 드라마의 소재로 활용한 '킹덤' 시리즈가 그 사례다.

김은희 작가가 투자한 서울 은평구 내 공동체 공간 '풍년빌라'(왼쪽)와 '여인숙'. 풍년빌라는 김 작가 데뷔작('위기일발 풍년빌라'·2010)과 이름이 같다. 양승준 기자
"그래 살아보자" 강남 아닌 은평구 '공동체 공간' 투자

백성과 청년의 고단함을 주제로 드라마를 쓴 작가는 현실에서도 공동체를 위한 공간에 투자했다. 2019년 서울 은평구 응암동에 세워진 '풍년빌라'와 2020년 같은 동네에 들어선 '여인숙'이다. 김 작가의 드라마 극본 데뷔작('위기일발 풍년빌라'·2010)과 이름이 같은 풍년빌라는 보증금 없이 월 45만~70만 원대의 임대료를 10년 동안 동결하는 조건으로, 여인숙도 보증금 없이 월 42만~60만 원 선의 임대료로 운영되고 있다. 4층으로 지어진 연면적 220㎡(총 67평) 규모의 풍년빌라엔 세 가구가, 5층으로 세워진 연면적 222㎡ 규모의 여인숙 3~5층엔 세 작가가 살고 있다. 부동산 업계에 따르면 응암동 일대 49㎡(약 15평) 기준 주택 월세가 55만 원(보증금 5,000만 원 기준)선. 주변 시세를 고려하면 김 작가의 건물 임대료는 저렴한 편이다. 김 작가는 생활이 어려웠던 보조 작가 시절을 떠올리며 후배 창작자들을 지원하자는 취지에서 '착한 임대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값싼 장기 임대로 공존의 대안을 보여준 김 작가는 '악귀' 마지막 회에서 산영의 입 등을 통해 "그래 살아보자" "잘하고 있어"라며 청춘을 응원한다. 김 작가는 "아름다운 분들에게 당신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말해주고 싶었다"고 했다.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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