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인에게는 서사를 줘선 안 된다'고 믿는 당신에게 [책과 세상]
"멈출 수 없었던 악마의 삶을 멈춰 줘서 감사하다."
2020년, 텔레그램에서 아동·청소년 여성의 성 착취물을 유포한 '박사방'을 운영하던 조주빈이 서울 종로경찰서의 포토라인에서 이렇게 말하자 시민들은 분개했다. 이윽고 유명 연예인을 비롯하여 많은 누리꾼이 '범죄자에게 서사를 부여하지 말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마이크를 들이민 언론에도 비난이 쏟아졌다. 어떻게 범죄자의 변명을 그대로 중계하고 있을 수 있느냐고.
그리고 이 같은 주장은 여러 종류의 악인, 특히 위계 격차를 이용해 약자나 소수자를 해한 가해자에 대해서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곧잘 정언명령처럼 여겨진다. 악인을 가장 편의적으로 호명할 수 있는 단어는 '사이코패스' 혹은 '소시오패스' 같은 단어다. 치명적인 악행을 저지른 흉악범이 검거되면 대중은 사이코패스 검사 결과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그가 어떠한 경로로 악인이 되었는지는 개인적·사회적 차원에서 논의되지 못한다.
악인의 서사를 말하는 것은 그 자체로 비윤리적인가. 그것이 꼭 악인에 '공감'하는 것이 아님에도, 절대악과 절대선으로 세상을 구획하는 이분법이 '선도 악도 아닌 희미한 회색지대'를 장악하면서 우리는 악을 어떻게 바라보고 사유해야 하는지조차 입 밖에 꺼낼 수 없게 됐다. '악으로부터의 멸균실'에서 어둠을 표백하고 사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게다가 사람들은 누구보다 악에 관심이 많지 않은가. 여러 텍스트의 빌런 캐릭터에 열광하고, 온라인에서 다수의 지탄을 받는 인물이 등장하면 지구 끝까지 쫓아갈 기세로 공격적인 말을 쏟아내는 것을 보라.
문학이라고 다를까. 작가가 현실 세계를 문학에서 재창조한다는 점에서, 문학을 비롯한 여러 텍스트는 악인을 바라보는 현실의 관점을 답습한다. 오늘날 창작자는 온·오프라인에서 막강한 비평 권력을 갖고 있는 관객과 독자, 대중에게서 '비윤리적인 작품'으로 낙인찍힐까 악을 아기 다루듯이 한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9인의 다양한 문학·문화 비평가들이 논쟁적인 주제에 뛰어들었다. 책 '악인의 서사'는 문학뿐 아니라 영화, 웹소설 등 다양한 창작물과 장르 속에서 악인의 서사가 어떻게 재현되는지를 고찰한 문화 비평 모음집이다.
"최근의 한국 소설은 텍스트 바깥의 악이 내부의 악과 긴밀히 연동되며 악이 지나치게 죄악시되는 형국을 보인다. 악은 제 얼굴을 내보일 조금의 자리도 허락받지 못하고 있으며, 그에 따라 선은 투쟁할 기회를 박탈당하는 와중이다." (80쪽)
문학평론가 전승민의 문단 진단이 매섭고 용기 있다. 문단 내 성폭력 고발 이후, 문단의 자발적 정화로 타자화된 여성 인물 재현이 척결된 것은 긍정하면서도, 그는 구체적인 악의 얼굴을 고의적으로 표백하는 일을 경계한다. 어떤 독자는 "'문학 속에서나마' 다른 세계를 보고 싶었다"고 항변할 수 있겠으나, 그는 "문학이 지닌 결기를 부정하는 기만적 태도"라고 단호하게 답한다.
흔히 사이코패스는 '짐승'으로 비유된다. 미 서부극을 통해 악인에게 서사를 부여하는 목적을 탐구하는 영화평론가 강덕구는 "사이코패스나 악을 동물성으로 규정하며 그 반대편에 인간성을 놓는 (인간중심주의적) 체계를 점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문화연구자 이융희는 "'악인에게 서사를 주지 말라'는 요구가 웹소설 분야에서도 대두되고 있다"고 꼬집는다. 그러나 웹소설에서의 악인은 대체로 주인공의 전지전능함을 돋보이게 하는 보조적 역할에 불과하며, 그마저도 금세 퇴장한다는 점에 주목하며 웹소설은 악인에게 서사가 주어지지 않는 장르라 본다. 영화평론가 듀나는 지난해 1월, 이 주제와 관련해 이뤄진 트위터 논쟁을 다시 소환하며 "악인의 이야기에 집착할 바엔 선인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게 낫다"며 대안을 제시한다. 그 밖에 번역가, 미스터리 전문지 편집장, 영문학 연구자 등 다양한 장르의 연구자와 평론가들이 각종 영화와 한국 드라마·소설, 세계문학 고전 등 창작물을 재료로 악인의 서사를 고찰한다.
책을 기획한 김지운 돌고래 편집자는 "정통 비평 중심의 기존 문예지에서는 주목하지 않을 법한 주제이지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큰 논쟁을 일으켰을 정도로 젊은 대중 독자에게는 갈증이 있었던 부분"이라며 "두 세계의 간극이 벌어진 가운데 담론의 공백을 짚는 시도를 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책은 '악인에게 서사를 주지 말라'는 명제를 9명의 시각에서 입체적으로 다루지만, 특정한 견해를 내세우거나 해석을 제한하지는 않는다. 그저 각자 영역에서 통찰 있는 비평적 글쓰기를 해온 필자들의 시각을 보여준다.
문학뿐 아니라 한국 사회 전반에서 '선하고 무해한 것'을 강박적으로 추구하는 경향이 짙어지면서 유독 악이 납작하고 빈약하게 사유된다. 책은 이에 대한 신속하고 시의적이며 용감한 문제제기라 할 만하다.
이혜미 기자 herstor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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