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희의 커피하우스] ‘선동 정치’에 춤추는 양평 고속도로
영국의 20세기 수사학자 스티븐 툴민은 고대 삼단논법을 보완한 ‘툴민의 논증 모델’로 유명하다. 대전제-소전제-결론으로 구성된 삼단논법이 다소 거칠다고 생각한 그는 전제와 결론을 이어주는 또 다른 장치인 ‘보증(warrant)’이라는 단계를 주목했는데, 가령 이런 것이다. ‘말기 암 환자는 죽는다’는 대전제와 ‘고로 A는 죽는다’는 결론이 있다고 할 때, 그 논리가 성립하려면 전제를 ‘보증’하는 상식과 믿음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즉 암이 곧 죽을병이라고 믿는 사회에서 통하는 논리라는 뜻이다. 눈부신 의학의 발달로 말기 암이 극복되고 생명 연장이 가능해진 사회에서는 ‘말기 암=죽음’ 논증이 통하지 않는다. 상식과 믿음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대통령 처가 일가의 땅값을 올려주려고 국토교통부가 서울-양평고속도로 노선을 변경했다는 야당의 공세가 놀라운 건, 그런 주장을 펼 수 있는 ‘그들의 상식’ 체계다.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전제는 ‘정부는 대통령 일가의 재산 증식을 위해 고속도로를 건설할 수 있다’는 것인데, 그건 전근대적 왕조 체제에서나 통할 논리다. 아마 그들은 집권 당시 그렇게 국가 재산을 이해하고 관리했나 보다. 세종시 부근에 ‘이해찬 나들목’이 있다고 알려진 이해찬 전 민주당 대표는 ‘이해찬다운 상상력’을 동원해 의혹을 제기했고, 그걸 현 대표가 ‘이재명식 정치 게임’으로 전환했다.
이해찬 전 대표가 과거 어느 인터뷰에서 우파를 겨냥해 “지난 70년 동안 해 먹었으니 이제 우리 차례”라는 취지의 말을 한 기억이 난다. 그에게 권력이란 ‘뭔가 해 먹는 일’임을 드러낸 말이다. 지난 정부가 남긴 금전출납부를 보면 그게 그들의 상식이었음이 분명하다. 사회 각 분야에서 마치 넘어진 사탕 트럭에 사탕을 주우러 달려드는 어린아이들처럼 곳간을 퍼내고 나눠 먹기 바빴으니 말이다. 사탕을 만들어 본 적도, 사탕을 내다 팔기 위해 트럭에 싣고 운반한 적도 없는 그들이 사탕 공장 사장의 세계를 이해할 수는 없다. 그렇게 70년 동안 권력자 재산을 불려주기 위해 고속도로를 놓고 개발을 해왔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난데없이 대통령 처가 땅지기로 공격받은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은 황당할 것이다. 민주당 소속 전 양평군수처럼 자기 땅도 아니고, 자기 처가 땅도 아니고, 대통령 땅도 아니고, 기껏해야 대통령 처가 문중 땅인데, 그게 설령 오른다 해도 그게 장관에게 무슨 실익이 될 것인가. 조금만 상식을 동원해도 가려낼 수 있는 억지 주장에 온 나라가 시끄러운 건 너무 다른 상식의 세계와 물불 안가리는 정쟁이 뒤엉켜 만들어낸 파노라마다.
통상 상식이 다른 사람과는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 서로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이다. 국가 재산을 권력자가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과 그래서는 안 된다고 믿는 사람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예산을 짤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아예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가치관이 달라도 합리적인 사람과는 얼마든지 대화와 소통이 가능하다.
혹시 합리적 의심을 조금이라도 합리적으로 해소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 문제를 논증적으로 접근하면 된다. 양평 고속도로 대안 노선이 건설되었을 때 김건희 일가 땅값이 얼마나 오를지를 논점으로 하여 경제적 이익에 대한 논쟁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정이 대통령 부인의 압력으로 이루어졌다는 증거가 나와야 한다. 이런 증거는 누가 제시해야 하는가. 의혹을 제기한 사람에게 소위 ‘증거 제시 의무’가 있다. 주장은 했지만 증거가 없다면, 그 주장은 ‘무죄 추정 원칙’에 따라 기각되어야 한다. 그게 토론 규칙이다.
그러나 막상 현실은 딴판으로 돌아가고 있다. 지난달 26일 국회에서 열린 국토교통위에서는 고성과 (장관에 대한) 훈계만 있었을 뿐, 어떤 증거 제시도, 그에 대한 논박도 없었기 때문이다. 합리적인 대화 근처에도 못 간 것이다. 애초에 논점에는 관심도 없고, 전체주의 사회에서나 통할 ‘유죄 추정 원칙’에 따라 증거 제시 의무를 상대에게 떠넘겨 ‘너의 결백을 네가 증명해라’라는 윽박지름만 있었다. 가상 화폐 같은 재테크 수단에 골몰할 때만 21세기형일 뿐 모든 것이 전근대 수준인 국회가 다시 밑도 끝도 없는 국정조사를 들먹거린다. 합리적 ‘대화’조차 할 줄 모르면서 무슨 ‘조사’를 하겠다는 것인지 알 길이 없다.
노선 변경 절차의 투명성이나 특혜 의혹은 숫자와 자료로 해명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아마도 통하지 않을 것이다. 숫자나 과학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 무슨 논쟁이나 설득이 가능할까. 유엔 보고서도 믿지 않는 사람이니 분기점(JC)이 땅값에 미치는 영향을 논문으로 써서 갖다 줘도 믿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정부가 대통령을 위해 길을 놓는다는 상식의 세계에서 사는 사람 생각을 무슨 수로 바꿀 것인가.
일각에서는 양평 주민들에게 의견을 물어 이 상황을 해결하자는 주장도 하는 것 같다. 주민의 의견을 경청하고 수렴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앞으로 유사한 일이 있을 때마다 주민 투표에 부쳐 해결할 요량이 아니라면 주민에게 최종 결정을 하게 하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니다. 책임 있는 사람들이 책임지고 해결하는 것이 낫다. 그래야 나중에 책임을 물을 수도 있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고속도로 노선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너무 다른,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거대한 상식 체계 사이의 대립이자, 진실이나 증거의 합리성을 무시한 거짓 공세와 벌이는 싸움이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그런 허위와 불합리에 고속도로가 춤추게 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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