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애·인종차별 책 다 빼”… 이념 전쟁터 된 美 도서관
미국 전역의 학교도서관과 공공도서관이 좌우 진영 간 ‘금서(禁書) 전쟁’에 휘말려 몸살을 앓고 있다. 공화당이 집권한 주(州)들이 동성애와 흑인 차별 실태 등 특정 주제를 다룬 책을 서가에서 퇴출시키려고 하자, 민주당과 좌파 단체들이 ‘표현의 자유’에 대한 침해라고 반발하면서 법적 분쟁이 잇따르고 있다. 미국의 문화·사회 분야에서 좌우 세력이 이념적으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이른바 ‘문화 전쟁’이 도서관으로 확대, 가열되는 양상이다.
미국 남부 아칸소주(州)의 티머시 브룩스 판사는 미성년자에게 ‘유해한’(harmful) 도서·자료를 비치한 도서관 사서 및 책임자를 형사 고발하도록 하는 법안 시행을 중단하라고 지난달 29일(현지 시각) 명령했다. 공화당이 상·하원 다수당을 차지한 아칸소주는 이달 1일부터 성적인 내용이나 정치적으로 부적절한 소재 등을 담은 책을 도서관에 비치할 경우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2500달러(약 32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한 법을 시행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를 막기 위해 지난 6월 아칸소주 시민단체 및 도서 단체들이 효력 정지 가처분 소송을 냈고, 이번에 법원이 이들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워싱턴포스트(WP)는 “지난 2년간 텍사스, 아칸소 등 적어도 7개 주가 선정적이거나 해로운 내용을 담은 책을 도서관에 비치하면 형사 처벌할 수 있는 법을 통과시켰다”며 “이를 거부하려는 시민 단체들의 반발 또한 거세다”고 했다.
미 중부에서는 1일 미시간주 도서관협회가 도서 규제 움직임에 반대하는 ‘나는 책을 읽을 권리가 있다’는 이름의 캠페인을 시작했다. 미시간주는 민주당 지지세가 우세한 곳인데, 최근 공화당 의원들이 동성애 등을 다룬 책을 도서관에 비치하는 행위를 범법화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이 지역 언론 미시간브리지는 “도서관 예산 삭감을 시도하는 방식도 동원해 도서관 9곳 이상을 전방위 압박하고 있다”고 전했다.
대표적 ‘보수 텃밭’인 텍사스주의 중부 소도시 래노 카운티는 2021년부터 올해 초까지 성소수자 및 인종 불평등을 다룬 17종의 도서를 금서로 지정했다. 반발한 일부 주민들이 소송을 제기했고, 지난 4월 법원은 금서 취소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보수 성향의 카운티 이사회가 판결에 반발해 학군 내 모든 도서관을 영구 폐쇄하는 안을 밀어붙이는 일이 발생했다. 미 공영 라디오 NPR은 최근 “주민들 반발로 폐쇄 시도가 막판에 무산됐지만, 래노 카운티가 항소해 ‘금서 분쟁’은 계속되고 있다”며 “지역 사회를 깊숙이 분열시키고 있다”고 했다.
미국도서관협회(ALC)에 따르면 작년 한 해 동안 특정 도서를 학교·공공 도서관 금서로 조치해달라고 요청한 건수는 1269건이다. 전년(729건) 대비 74%나 증가했다. 이는 ALA가 20년 전 처음 집계를 시작한 이래 최고치다. 금서 요청을 받은 도서 상당수가 LGBTQ(성소수자)에 관한 내용을 담거나, 흑인 차별 실태 또는 경찰의 폭력성 등을 자세히 다룬 책이다. 보수 성향의 학부모들이나 시민단체들이 주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고 한다. WP는 “일부 학부모 단체들이 시작한 금서 요청에 보수 정치권이 본격 가세하면서 검열·금서 조치가 전국적으로 확대되는 추세”라고 했다.
작년 한 해 동안 가장 많이 금서 조치 요구를 받은 책은 ‘젠더 퀴어(Gender Queer)’라는 제목의 만화다. 저자가 청소년기를 거치면서 자신이 여성과 남성이라는 이분법적 성별에 속하지 않는 ‘논바이너리(non-binary)’이자 무성애자라는 것을 깨닫는 과정을 담은 회고록이다. 보수 성향의 학부모들은 이 책이 청소년들에게 동성애를 부추기고 있다며 반발하고 있다. 미국 흑인 여성 작가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토니 모리슨의 ‘가장 푸른 눈’도 금서 요구를 많이 받은 도서 3위에 올랐다. 성폭행과 근친상간 등이 다뤄졌다는 것이 이유였지만, AFP통신은 “미국의 적나라한 인종차별 역사를 다룬 것에 대한 백인 사회의 반발이라는 시각도 있다”고 전했다. 미국에서 금서 요구 1~5위에 오른 책 모두 한국에서 번역 출간됐다.
보수 진영의 ‘금서 지정 운동’은 진보 진영이 ‘정치적 올바름(PC·Political Correctness)’을 내세우며 문화·예술 분야를 지나치게 검열해왔던 것에 대한 반작용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예컨대 미국 백인 작가 하퍼 리가 1960년 출간한 소설 ‘앵무새 죽이기’는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을 비판한 소설로 세계의 주목을 받았지만, 흑인을 비하하는 ‘니거(nigger)’ 단어가 여러 차례 나온다는 이유로 진보 진영의 거센 공격을 받았다. 이에 이 책을 교과과정에서 제외하는 학교들이 늘어나면서 예술에 대한 과도한 제재 논란이 일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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