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런던을 홀린 한국 설화 속 구미호, 더위 잡으러 돌아왔다

허윤희 기자 2023. 8. 4.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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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미술계가 주목하는 한국계 캐나다 작가 제이디 차 국내 첫 전시
제이디 차, '깊은 꿈에 빠지다'. 2023. Oil on canvas. 360 x 200cm./스페이스K 서울

보름달 뜬 깊은 밤, 여우가 사람으로 변신했다. 등을 돌린 채 얼굴만 보이는 그의 뒤로 꼬리 아홉 개가 출렁거린다. 망토에 휘감긴 두 마리 새, 뒤를 쫓는 비현실적인 동물의 형상이 몽환적 배경과 어우러진 그림의 제목은 ‘깊은 꿈에 빠지다’.

등골 서늘한 납량 전시가 서울 마곡동 스페이스K 서울에서 열리고 있다. 세계에서 주목받는 한국계 캐나다 작가 제이디 차(40)의 국내 첫 개인전 ‘구미호 혹은 우리를 호리는 것들 이야기’다. 캐나다 교포 2세로 자라고 영국에서 활동하는 작가가 겪었던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혼종’의 정체성과 경계인의 아픔을 풀어냈다. 한국 전통 문화와 설화에서 영감받은 회화, 설치, 조각 등 33점을 소개한다. 제이디 차는 “북아메리카에서 자라면서 언제나 한국 문화의 전통에 매력을 느꼈다”며 “대구가 고향인 어머니가 어린 시절 밤마다 들려주던 구미호, 바리데기 등 전래 동화와 설화가 재료가 됐다”고 했다.

제이디 차, '집'. 2023. Oil on canvas_55 x 70 cm. /스페이스K 서울

전시장은 미로처럼 구성됐다. 해태를 탄 마고할미가 미소를 지으며 관람객을 맞는다. 그 뒤 두 개의 문을 통과하면 본격적인 미로 탐험이 시작된다. “관람객들이 여행하는 기분을 느끼거나 각각의 작품과 오롯이 대면하는 느낌을 주려 했다”는 작가의 의도가 반영됐다. 좁은 벽을 따라 파격적인 초상화 형식의 그림들이 걸렸다. 갈매기 머리에 인간 몸을 합치거나, 소녀의 긴 머리카락이 백호(白虎)와 얽혀있는 식이다. 까마귀, 여우, 갈매기 같은 동물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각각의 동물은 다른 동물과 혼종돼 있기도 하고, 반인반수 캐릭터로 등장하기도 한다. 현실에서는 사람들에게 성가시거나 해로운 존재로 여겨지는 동물에 신화적 상상력을 더해 권능한 존재로 탈바꿈시켰다.

제이디 차, '미래의 우리들'. 2023. Oil on canvas. 55 x 70 cm. /스페이스K 서울

주름이 깊게 파인 할머니도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모나리자’처럼 상체를 살짝 돌리고 화면을 응시하는 할머니 초상화의 제목은 ‘미래의 우리들’. 작가는 “세계 여러 문화에서 나이 든 여성은 마귀 할멈처럼 사악하게 묘사되거나 존중받지 못하는 힘없는 존재로 그려지는데, 한국 설화에서 할머니는 우주 만물을 창조한 신(마고할미)이자 인간의 탄생에도 관여하는 존재(삼신할미)”라며 “전통 설화는 나에게 한국 할머니들이 지혜와 통찰을 겸비한 강인한 주체였다는 사실을 알려줬다”고 했다.

제이디 차는 캐나다의 에밀리 카 예술대를 졸업하고 런던 왕립예술대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퍼포먼스를 선보였고, MoMA(뉴욕현대미술관) PS1, 상하이 비엔날레 등 전시에 이어 지난해 런던 유명 갤러리 화이트채플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세계적으로 ‘잘나가는’ 작가이지만, 그는 “평생 어느 한 곳에 온전하게 소속되지 않은 이방인”이라고 말한다. 한국 전통 설화 캐릭터와 소외된 존재를 이민 2세대의 눈으로 결합한 것도 이런 경험이 영향을 미쳤다.

폭염을 잊기에 좋은 전시다. 사악하고, 나약하고, 부정적인 것들에 대한 편견을 통쾌하게 뒤집는다. 그는 “한국의 청년들에게 우리가 갖고 있는 사소하지만 위대한 것들을 유심히 바라보라고 얘기하고 싶었다”며 “전통은 우리를 정말 특색있고 흥미롭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라고 했다. 10월 12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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