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DO 우체통] 1980년 사북에게 사과를
‘편지도 기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강원도민일보 편집부가 지난해 런칭한 ‘편집기자가 운영하는 펀(FUN)집숍’에 이어 올해 독자들에게 띄우는 ‘KADO 우체통’의 문을 엽니다. 딱딱한 기사체에서 벗어나 신문에서 만나는 보드랍고 따스한 편지 한 줄. 기사라는 것은 결국 기자가 독자에게 보내는 편지와 같다는 생각으로 편집부 기자들이 다양한 수신인에게 편지를 전합니다. 수신인은 미담 기사 속 작은 영웅일 수도, 사건 기사 속 피해자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당신이 즐겨보는 드라마의 작은 조연, 아니면 당신이 즐겨찾는 카페의 커피한잔이 될 수도 있습니다. 수신인에는 경중이 없습니다. 그저 위로와 응원만이 있을 뿐.
KADO우체통에서는 미니엽서 두장 ‘시인하는 기자-부인하는 기자’도 만나볼 수 있습니다.‘시인하는 기자’는 등단시인으로 활동하는 박희준 편집기자가 전하는 서정의 시편지입니다. ‘부인하는 기자’는 편집부 유부녀 기자 2명이 세상의 모든 부인(婦人)에게 보내는 공감의 편지입니다. 한달에 한 번, 잠자고 있던 당신의 우편함을 확인하세요.
칠년 전 ‘내 사랑 사북’이라는 연극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이옥수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은 16살 소녀 수하의 시점으로 1980년 정선 사북 동원탄광촌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광부인 아버지와 사택에서 사는 수하와 가족들. 탄광에서 일하는 청년 정욱을 짝사랑하며 설레기도 괴롭기도 한 하루하루를 보내던 수하의 삶은 1980년 4월 사북항쟁이 일어난 뒤 많은 것이 바뀌었습니다. 광부들을 산업역군이라 치켜세우는 이면에는 터무니없이 낮은 임금과 잦은 사고가 있었고, 수하의 아버지는 탄광에 갇혔다가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온 뒤 열악한 노동환경을 바꾸기 위해 파업에 앞장섭니다. 사흘간 치열하게 싸운 이들은 마침내 승리를 이뤄낸 듯 했습니다. 하지만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말했던 정부는 말을 바꿔 광부와 가족들을 ‘폭도’, ‘빨갱이’로 몰아 무자비하게 연행했습니다. 수하의 짝사랑 정욱은 사건 주모자로 잡혀간 뒤 더 이상 볼 수 없었고 고문을 견디고 풀려난 수하 아버지는 몸 뿐만 아니라 마음도 피폐해져 탄광에서 일을 지속하기 힘들어집니다. 결국 수하네 가족은 도망치듯 사북을 떠납니다.
2023년 4월. 43년이 흐른 후 당시 광부와 가족들의 이야기가 강원도민일보에 실리기 시작했을 때 기억 속 숨어있던 수하 가족의 삶이 다시 펼쳐지는 것 같았습니다. 연극 한편으로 피해자와 유족들의 상처를 감히 다 헤아릴 수는 없지만 사북항쟁을 잊지는 않을 것입니다.
기사를 읽어보면 사북항쟁 주도자라는 꼬리표가 붙어 더 이상 정선에서 일할 수 없었던 한 분은 타지역으로 떠난 뒤에도 또 잡혀갈까 두려워 억울하게 고문 받았다는 얘기를 하지 못한 채 쥐 죽은 듯이 살았다고 합니다. 농성 중 경찰의 지프차에 치여 허리를 크게 다친 한 광부는 그 뒤 제대로 된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남편을 대신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아내는 절박하게 살아왔던 삶이 무색하게 아무런 사과도 받지 못한 채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수면장애를 얻어 날마다 약으로 지낸다고 말합니다. 동명이인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 경찰의 실수로 강제 연행돼 고문받았던 피해자는 당시도 지금도 사과 한마디 듣지 못했습니다.
지난 7월 13일 사북항쟁 피해자 4명에 대해 무죄가 선고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반세기 만에 받아낸 무죄 판결이지만 씁쓸함을 느낀 것은 국가폭력에 대한 사과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피해자들이 이미 세상을 떠난 상태에서 이뤄진 판결이라는 점입니다.
무고함을 증명하기 위해 적지 않은 세월 노력했지만, 아직도 ‘죄인’으로 남아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숨죽이고 있던 세월을 지나 용기 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외쳤지만 변하지 않는 현실에 지금은 모든 걸 포기하고 잊고 싶다고 말하는 분의 심정을 우리는 어떻게 매만질 수 있을까요.
극 중 광부와 주민들이 끊임없이 외치던 말들이 있었습니다.
“1980년 4월 21일”
처음 연극을 볼 때는 그날을 잊지 말라고. 자신들을 잊지 말라는 것으로 들렸는데 지금은 그 당시에서 벗어날 수 없음에 괴로움을 토로하는 것으로도 들리는 것 같습니다. 폭력의 피해를 피해자가 입증해야 하는 잔혹한 세상에서 우리는 그동안 그들에게 어떤 시선을 보내고 있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이 세상천지에/ 우리의 검은 손 잡아줄 사람 아무도 없단 말인가?/ 이제 늙은 아버지 어머니 된 우리의 소원은/ ‘폭도’라는 이름의 주홍글씨/ ‘사북사태’란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다/ 얼마 남지 않은 인생,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기 전에. 1980년 ‘사북’을 말한다 - 성희직
황지영 hwang@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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