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석재의 돌발史전] 흐르는 강물을 어찌 막으랴

유석재 기자 2023. 8. 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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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보의 詩, 그리고 변화를 견뎌내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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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보(杜甫), 두공부(杜工部), 두자미(杜子美), 두소릉(杜小陵).

만일 어느 옛 글에서 위 네 이름을 가진 사람 중 한 명이 나온다면, 저 네 이름 중 한 사람이 쓴 시구 한 구절이 등장한다면, 당신은 굳이 헛갈리거나 인명을 찾느라고 애쓸 필요가 없겠지요. 모두 다 같은 사람입니다. 712~770. 당(唐)의 대시인(大詩人). 시성(詩聖) 두보.

그는 언젠가 ‘가탄(可嘆)’이란 칠언시를 쓴 적이 있습니다. 그 첫머리는 이렇습니다.

저 하늘 뜬구름 흰 옷과 같더니

돌연 검푸른 강아지 모양으로 변하였구나

세상사 옛날이나 지금이나 이와 같거늘

인생만사에 무슨 일인들 일어나지 않겠는가.

天上浮雲似白衣(천상부운사백의)

斯須改幻爲蒼狗(기수개환위창구)

古往今來共一時(고왕금래공일시)

人生萬事無不有(인생만사무불유)

시인 왕계우(王季友)는 시성 두보의 벗이었습니다. 기록은 이렇게 그를 전합니다. 집안 형편은 어려웠지만 품행이 방정하고 독서를 부지런히 했으며 (따라서 당연히) 참되고 성실한 사람이었다…는. 사실, 보통 여항(閭巷)의 여인들이 가장 선호하지 않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결혼정보회사에서 그다지 회원 대우를 해 주고 싶지 않을만한 인물.

속사정이야 어땠는지 당사자밖에는 알 수 없겠습니다만, 그리고 그런 것은 그 때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질 것도 없겠습니다만, 어쨌든 그의 아내는 그를 버리고 집을 나가 버렸습니다. 사람들의 비난이 왕계우에게로 쏟아졌습니다. 백수인 저를 여태껏 보살펴 주고 고생해왔던 사람이 누군데… 아깝지, 여자가 아까워…

시성 두보를 그린 삽화.

누가 내막을 알았겠습니까. 어쩌면 그건 시성인들 별 차이가 없었겠지요. 당신에게 지음(知音)이 있다면, 그리고 그 친구가 어느날 갑자기 이혼했다면, 당신은 심정적으로 누가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까요. 하지만 두보는 누가 더 잘하고 잘못했는지를 따지자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애통해한 것은 조변석개(早變夕改), 상전벽해(桑田碧海)인듯 쉽게 바뀌는 세평(世評)이었습니다. 어제의 올바른 선비가 오늘은 형편없는 인물이 되다니!

그리고, 이 시구에서 ‘백운창구(白雲蒼狗)’라는 고사성어가 나왔습니다. 뜻은 ‘상전벽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세상사, 이렇듯 무상(無常)한 듯 싶습니다. 어제의 호인(好人)이 오늘의 악인(惡人),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 1941년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하자 윈스턴 처칠은 ‘스탈린과 동맹을 맺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만약 히틀러가 지옥을 침공했다면, 나는 의회에서 적어도 악마에 대해 호의적으로 말했을 것이다.”

변합니다, 모든 것은. 어느날 아침 자리에서 일어나 창 밖을 보니 햇볕은 여전히 내리비치고, 강물은 여전히 바다로 흐를지언정, 그 사이에서 꿈틀대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쉴새없이 달라지고 바뀝니다. 당신이 요즘 만약 아직 버리지 않은 일주일 전 신문을 펼쳐든다면 그 짧은 간격 동안 일어난 변화에 새삼 놀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변화를 두려워하기 쉽습니다. 낯익은 것들과의 결별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모험가는 당대(當代)에 한 줌 나올까 말까 합니다. 물론 위대한 구루들의 말씀들이야 항상 당당하고 패기에 차 있기 마련입니다. “변화는 고통스러우나 필요한 것이다”(칼라일) “변화를 언제나 영(靈)의 소산이 되게 하라”(톨스토이) “참된 변화는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내면에 있다”(드러커)…

하지만 때로 지나치게 강한 변화에 대한 주장은 일종의 심리적 공포감의 반사(反射)일 수도 있습니다. 오래 전 제가 다니던 고등학교의 교장 선생님은 항상 “콤퓨타를 배워야 돼! 콤퓨타를 안 배우면 인생의 낙오자가 돼!”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었지요. 지금 생각해 보면 결과적으로 사교육을 알아서 전수받으라고 주장하던 셈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공포나 반사도 흐르는 강물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 강물은 반드시 사필귀정으로 흐르는 것이라고 볼 수도 없습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그래왔듯이, 어쨌거나 세상이 바뀌는 것을 견뎌야 한다는 말입니다. ‘미래가 많이 남은 사람이 투표권을 더 많이 가지는 것이 합리적’ ‘교수라 철없이 지내 정치언어를 잘 몰랐다’는 식의 기상천외한 언어가 출현하는 것조차 눈 똑바로 뜨고 견뎌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진이 인쇄된 종이를 손바닥으로 때리는 일이야 당장 속이 시원해질지는 모르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할 것입니다.

코로나19가 정점을 이루던 시절 미국 작가 빌 헤이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망할 놈의 산 너머에는 과연 뭐가 있는지 보고 싶다!” 별거 없지 않느냐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만, 이제 보니 아직 산 아래까지는 도달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유석재의 돌발史전’은

역사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입니다. 뉴스의 홍수 속에서 한 줄기 역사의 단면이 드러나는 지점을 잡아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매주 금요일 새벽 여러분을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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