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서 애도 문자 쏟아진 ‘보헤미안’ 노동운동가 윤영모

한겨레 2023. 8. 3.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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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신이의 발자취][가신이의 발자취] 윤영모 전 민주노총 국제국장을 기리며
등산을 하며 활짝 웃는 고인의 생전 모습. 이창휘 제공

2019년 6월14일 베트남 국회는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가운데 하나인 단체협상권에 관한 협약 98호를 만장일치로 비준했다. 곧이어 독립 노조를 인정하는 것을 뼈대로 한 노동법 개정안도 압도적 찬성으로 통과됐다. 거의 20년에 걸친 노력이 결실을 맺던 역사적인 순간, 베트남 노동부와 국제노동기구 베트남 사무소에서는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그 환호성의 중심에는 윤영모라는 한국 사내가 있었다. 그는 2009년 국제노동기구 베트남 노사관계 개혁 프로그램의 책임자로 부임한 이래 노사정 행위자들과 호흡을 맞춰가며 정치적 금기어로 토론조차 불가능한 것을 마침내 현실로 만들어냈다.

친구의 아틀리에에서 작업하는 모습. 고인은 목각을 좋아했다. 이창휘 제공

어찌보면 윤영모는 운명적 떠돌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무렵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다친 누님 뒷바라지를 위해 온가족이 이민가게 됐다. 1980년대 멜버른대에서 철학 공부를 하던 그의 인생을 바꾼 것은 80년대 중반 한국에서 타오르던 민주화운동이었다. 그는 1984년 ‘대책없이’ 오스트레일리아에서 한국으로 훌쩍 날아와, 민주화 운동의 온갖 뒤치다꺼리를 하기 시작했다. 1996년 그는 막 출범한 민주노총의 초대 국제담당 부장과 국제국장을 역임하며, 한국 노동운동의 국제화에 커다란 공헌을 하게 된다. 천성적인 호기심, 예리한 관찰력, 그리고 노동의 미래에 대한 열정 덕분에 윤영모는 노사관계에 대한 탁월한 이해력을 키워갔고, 특히 원어민보다 뛰어난 영어 실력까지 보태져, 그는 곧 한국 노동운동의 국제대변인으로 활약하게 되었다. 특히 한국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이후 경제협력개발기구에서 진행된 한국의 노동법에 대한 논쟁에서 한국 정부 대표들을 압도하며 한국 노동운동의 입장을 옹호한 일은 지금까지도 우리 노동운동 국제활동 역사의 전설이다. 또 그는 종군위안부 문제를 국제노동기구에서 의제화해 국제화하는 데에도 많은 공헌을 했다. 이미 1990년대 말에 그는 국제노동운동과 국제노동기구의 주요 인사들이 주목하는 인물로 성장해간다.

노사관계에 대한 탁월한 이해력과
원어민보다 뛰어난 영어 실력으로
한국 노동운동의 국제대변인 역할
OECD서 한국정부 압도한 논쟁은
노동운동 국제활동 역사의 전설

ILO 베트남 노사관계개혁 책임자로
2019년 노동개혁·협약비준 끌어내

민주노총 국제국장직을 내려놓은 그는 한국노동사회연구소의 국제정보센터장(2003~2008)으로 일하게 된다. 그가 국제노동기구의 컨설턴트로 몽골 등에서 일하게 된 것이 바로 이 시기였다. 그를 눈여겨보던 필자를 포함해 국제노동기구의 지도부는 그를 어떻게 국제노동기구로 스카웃할 것인가 생각하고 있었다. 마침 필자가 영국 정부의 지원금으로 베트남 노사관계 개혁 프로그램을 만들게 됐다. 베트남 노사관계 개혁을 위한 그의 열정적 여정은 그렇게 시작됐다.

2019년 5월 국제노동기구(ILO) 100주년 기념식에서 베트남의 하이퐁 자유수출지역 노조위원장 ‘항’과 함께 찍은 사진. 이창휘 제공

그와 베트남의 운명적 만남은 베트남의 많은 친구들의 삶을 바꾸어 놓았고, 또 그 자신이 거듭나게 된다. 국제기구의 ‘공무원’이 된 그는 사실 ‘공무원’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또 노동운동가라고 하면 떠오르는 전투적 이미지와는 가장 거리가 먼 장난꾸러기, 자연인, 자유인,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없이 따뜻한 심성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그는 베트남 (그리고 중국, 몽골) 친구들의 마음 속으로 걸어 들어가 그들의 마음 속에 희망과 즐거움을 불어넣었다. 하루하루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동고동락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변화가 만들어진다는 것이 그의 믿음이었다. 부임한 지 1년도 채 안되어서 그는 크고 작은 놀라운 변화들을 불러오기 시작했다. 2012년 노동법 개혁 시기에는 베트남 역사상 처음으로 노사정이 대등하게 협의하고 협상을 통해 최저임금을 정하는 시스템을 정착시켰다. 관료주의에 젖어 활력을 잃고 있던 베트남 노총의 활동가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어, 새로운 조직화 사업 및 단체협상 실험이 시작된다. 수많은 새로운 노동운동의 작은 영웅들이 그와 함께 일하면서 성장해갔다. 또 베트남 노동부의 핵심 인물들도 감동시켜 가면서, 어려운 개혁과제들을 함께 풀어나갔다. 윤영모의 이런 전방위적 노력이 없었다면, 2019년의 노동법 개혁과 핵심협약 비준이라는 놀라운 결과도 없었을 것이다.

베트남 하이퐁의 노조 간부와 함께 맥주잔을 기울이는 모습. 이창휘 제공

하지만, 그는 심각한 노동운동가이기 이전에, 그리고 고리타분한 국제공무원이기 이전에, 속이 깊고 정이 많은 동네형이었다. 자상한 아빠이자 남편이고, 매일 구순 노모에게 문안 인사를 잊지 않는 아들이었다. 2015년 외동딸 혜린이를 먼저 여의고 절규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러던 그이가 이 세상을 떠났다. 믿겨지지 않은 소식을 듣고 그의 베이징 집에 달려갔을 때 그이는 편히 잠들어 있었다. 살짝 미소를 띈 듯한 표정으로…. 하늘나라에서 혜린이를 만난 것일까? 평생 보헤미안이었던 그가 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전 세계에서 애도의 문자가 쏟아져 들어온다. 좋은 사람은 떠나고 나서야 그 진면목을 알게 된다. 그가 오랫동안 그리울 것이다. 윤 선배, 꿈에서라도 만나 소주 한 잔 합시다.

이창휘 국제노동기구 중국·몽골 사무소 대표

이창휘 ILO 중국·몽골 사무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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