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아니 불(不)’의 명상
어둑해진 퇴근길, 여의도 부근에서 막혔다. 때마침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는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무심코 툭툭 던지는 잔잔한 가사로 오래전의 사연을 마치 어제 겪은 일인 듯 속삭이는 김광석은 왜 이렇게 내 마음 글썽이게 하는가.
“밤하늘에 빛나는 수많은 별들/ 저마다 아름답지만/ 내 맘속에 빛나는 별 하나/ 오직 너만 있을 뿐이야”에 이르러 노래는 높고 길게 감정을 끌어올린다. 텅 빈 방에서 빛나는 별로 전개되는 저 급소를 창문을 열고 따라 부르다가 알았다. 밤하늘을 상대하기에 나는 작고 내 입은 너무 좁구나.
매미 울음을 바탕으로 여름 한철 한문하고 지내는 것도 피서법의 하나다. 그렇다고 그리 거창한 공부는 아니고 고전번역원의 경서성독을 따라 읽는 정도이다. 초심자이다 보니 좀 사소하고 엉뚱한 의문도 든다. 한문에는 부정이나 금지를 나타내는 글자들이 빈출한다. 莫, 亡, 無, 毋, 勿, 未, 不, 否, 弗, 非. 왜 이 음가는 모두 미음이거나 비읍일까. 긍정을 뜻하는 可, 肯, 當, 是, 然, 適, 合은 기역부터 히읗까지 비교적 다양하다. 이들은 그냥 중국어 발음을 좇아 그렇게 된 것뿐일까? 최근 북한산성 오르다가 새마을교 건너 갈림길에서 이런 안내판을 만났다. ‘탐방로 없음. No trails. 沒有 探訪路.’ 새롭게 추가된 몰(沒)도 또한 미음이었다.
‘아니 不’은 논어, 맹자, 장자의 첫 대목에 모두 등장하는 대표적인 부정어다. 不은 꽃잎을 잃어버린 꽃받침을 상형한 것이라 한다.(시라카와 시즈카) 시든 들국화의 꽃대에서 그윽한 不을 읽다가, 나무의 줄기와 가지로 시선을 옮기다가 알았다. 길 없는 공중에서 두 길을 만들며 차례차례 진출하는 나무는 도립한 ‘아니 不’의 집합체구나.
아니다,라는 부정은 그렇다,는 긍정보다는 훨씬 많은 여지를 제공한다.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이는 한문의 부정어들. 저 부정의 정신을 발판으로 우리는 다음으로 또 나아가는 것. 나무가 저토록 숭고한 위엄과 지극한 깊이를 갖는 건, 저 부정의 미를 간직한 덕분일 것이다.
너무 덥다. 입이 아주 큰 기이한 곤충처럼 전신을 꽉꽉 물어대는 더위. 온난화를 지나 열대화로 진입했다는 불길함 속에서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천천히 몸을 뒤척이는 나무들의 궁리.
이갑수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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