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국의 우리문화 들배지기] 마음그림
“내가 난초를 치는 것은 마음을 그리는 데 있지 붓털을 비벼(난초의 외형을 그려)내는 데 있지 않다(余之寫蘭 只寫胸臆 不寫毫抹).” 이것은 표암 강세황(1713~1791)의 <흉억란胸臆蘭>(도판)의 화제다. 하지만 단순한 텍스트가 아니다. 흉억(胸臆)이 표암은 물론 조선 문인예술의 궁극임을 서화일체로 선언한 결정이다. 즉 표암예술의 방점은 사물을 빌려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는 데 있지 외물이나 기법과 같은 호말(毫抹)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난초는 난초를 넘어 표암이 된다.
이런 맥락에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요아힘 베케라르가 1569년에 그린 <4원소:물>(거장의 시선, 사람을 향하다 - 영국 내셔널갤러리명화전)에 등장하는 시장의 물고기를 보자. 흉억보다 호말에 방점이 찍힌다. 르네상스를 지나 바로크시대에 그려진 물고기가 너무나 생생하여 지금도 살아 꿈틀거리고 있다. 빛을 그려내고 사물을 환원시키면서 서구미술의 흐름을 뒤바꾼 인상파나 큐비즘의 시선도 크게 보면 내면보다 외물로 향하기는 마찬가지다.
클로드 모네 <붓꽃 Irises>을 보면 올 오브 페인팅에다 형사(形寫)에 무게 중심이 있다. 붓끝이 중세의 신에서 르네상스를 지나면서 인간의 일상사로, 다시 산업혁명 이후에는 인간의 감정을 향하고 있다. 하지만 표암의 <흉억란>과 같이 대상과 내가 하나 된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를 추구한 것은 아니다. 조형언어는 흉억과 호말, 즉 내면 표출과 대상 재현이라는 동서의 상반된 시각이 공존할 때에 비로소 온전한 하나가 됨을 지금에 와서 알게 된다.
하지만 지금 한국미술의 근본문제는 호말일변도로 뒤바뀌었다는 데 있다. 그래서 표암의 <흉억난>과 같은 조형과 공간경영은 해독이 잘 안된다. 편파구도에다 화면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여백은 백지답안지로 읽힌다. 소밀(疏密)과 허실(虛實)의 미학은 말장난으로 들린다. 난초 잎을 친 입체의 필획(筆劃, Stroke)은 선(線, Line)으로 오독되면서 표암의 골기와 정신은 온데간데없어진다.
로버트 마더웰의 <스페인 공화국에의 비가(悲歌)>와 같은 추상표현주의 작품을 격찬해도 그 뿌리가 필획인지는 모르는 경우다. 울긋불긋한 색에 중독된 관객들의 입맛에는 검고 검은 현지우현(玄之又玄)의, 오만가지 색이 녹아 있는 먹이 맞을 리 없다. 심심하고 싱겁고 무미할 뿐이다. 이런 판국에 미메시스 너머에 있는, 같으면서도 같지 않는 <흉억란>의 사여불사(似如不似)의 내면의 소리가 들릴 리 없다.
이런 문맹에 가까운 필묵언어는 시장으로 학교로 전이되면서 악화를 심화시킨다. 한국미술의 생태계는 사상누각 지경이다. 이미 서구체계로 굳어지면서 그 기저가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보통 표암의 그림이 수천만원대라면 표암급의 서양 작가는 수백억대이고, 작품 진위 판별 혼돈으로 인한 고미술시장 불신은 고질병이 된 지 오래다. 35년 만에 대학 서예과는 사실상 폐과되었고, 동양화과조차 서예과목은 가르치지 않는다. 물론 이런 결과는 식민지 서구교육 100년의 당연한 귀결이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이대로 계속 남의 잣대로 우리의 아름다움을 재면서 스스로를 디스할 것인지, 아니면 서구를 우리 것으로 녹여내어 제3의 미를 여기서 여하히 창출해낼 것인지는 전적으로 우리 손에 달렸다.
당면 과제는 흉억이 화두인 서화언어 회복이다. 그 위에서 인공지능과 기후변화시대, 인간의 기계화 문제와 자연환경 파괴 문제를 흉억으로 제대로 품어낼 수 있다.
이동국 예술의전당 수석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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