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의 문헌 속 ‘밥상’] 감자가 태평양을 건너면
“감자는 남작과 수미 외에도 여러 품종이 있다. 이 품종은 크게 분질과 점질로 나뉜다. 분질 감자는 그냥 쪄서 먹거나 으깨어 샐러드에 넣고, 점질 감자는 길쭉하게 썰어 볶음으로 먹거나 감자칩을 만드는 데 적합하다.”(주간동아, 제752호, 2010년 8월30일)
불볕더위 속에서도 감자는 시장 곳곳 여기저기서 꿋꿋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감자 반찬이며 감자전이 있는 밥상의 소담함, 갓 쪄 낸 감자의 넉넉한 느낌을 떠올리니 절로 미소가 번진다. 머릿속으로는 황교익 칼럼니스트의 말글이 떠오른다. 보신 바와 같다. 감자의 속성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데 가장 요긴한 개념은 다른 무엇보다도 ‘분질(粉質)’과 ‘점질(粘質)’, 이 둘이다. 온 지구에 무수한 품종의 감자가 있지만 조리와 음식에 잇닿은 핵심은 분질이냐, 점질이냐이다.
예컨대 북미에서는 껍질이 잘 일어나는 러셋 버뱅크(Russet Burbank), 레인저 러셋(Ranger Russet) 등 러셋 돌림자 품종이 널리 재배되고 있다. 으깨 만드는 감자 요리(mashed potatoes), 감자튀김(french fries) 등에 딱이다. 이런 데 어울리는 감자가 분질 감자이다.
분질 감자는 잘 끊어지고 잘 썰리고 모양 잡기에 좋다. 익힌 덩이를 부수거나 으깨는 동안 공이·주걱·숟가락·용기 따위에 덜 붙는다. 틀에서는 말끔히 떨어지고, 구멍에서는 쏙 빠진다. 덜 질척이기 때문이다. 한반도에서 그동안 분질 감자를 대표해온 남작도 그렇다. 황 칼럼니스트의 설명을 빌리면, 남작은 “솥에 찌면 겉이 쫙쫙 갈라지고, 입에 넣으면 보슬보슬 풀어”진다.
남작의 본향(本鄕) 또한 북미이다. 1876년 아이리시 코블러(Irish Cobbler)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나왔고, 오늘날에도 북미 가정에서 감자샐러드용으로 쓰인다. 이 품종이 홋카이도로 들어오면서 ‘남작(男爵)’이라는 말이 붙었다. 1930년대에 조선으로 들어온 이후로는 특히 강원도를 중심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런 점을 인용·확산 가능한 말글로 매체에 제시한 이가 황 칼럼니스트이다. 다시 점질 감자 수미에 대한 그의 설명을 따라가 보자.
점질의 수미는 “삶으면 찐득한 느낌”이되 “남작에 비해 단맛은 더 있”다. 수미는 “제주에서 강원까지 사철 재배가 가능”했고, “지역 적응성과 수확량에서 월등”했다. 깍둑썰기하든 채썰기하든 조림·볶음·전에서 따로 놀지 않는다. 찌개나 국에서는 국물음식에 어울리는 만큼 전분을 풀어낸다. 막 캐서 얼마간은 분질의 속성도 품는 미덕이 있으니 전국형-만능형이었다.
수미는 1961년 미국 위스콘신대학에서 육성해 1962년 출시한 품종이다. 원래 이름은 슈페리어(Superior)이고, 1975년 한국에 들어오면서 그 음과 뜻과 고향을 아우른 ‘수미(秀美)’라는 새 이름이 붙었다. 가차 겸 번안의 작명이다. 1978년에는 보급종으로 선정되는 데 이른다. 북미에서 감자칩을 위한 품종으로 태어났으되, 태평양을 건너서는 한반도의 봄여름 및 겨울 재배 품종, 다수확 품종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윽고 한국인 일상의 추이와 함께 감자칩의 쓰임도 회복한다. 만만찮은 사연이다. 못잖은 남작 이야기는 다음을 기약한다.
고영 음식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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