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럼] K-클래식 주인공들의 화려함과 겸손함
지난 7월은 비가 예년에 비해 무척 많이 내린 것 같습니다. 이미 전국적으로 피해가 크다는 뉴스가 전해져 걱정입니다. 하지만 음악계에는 많은 낭보가 연이어 나온 달이기도 합니다.
쇼팽 콩쿠르, 차이콥스키 콩쿠르와 함께 '세계 3대 콩쿠르' 중 하나로 불리는 벨기에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아시아 남성 성악가 최초로 바리톤 김태한이 우승을 차지했고요, 영국 BBC 카디프 싱어 오브 더 월드의 가곡 부문에서 테너 김성호가 우승을 차지해 2년 전 바리톤 김기훈(아리아 부문)에 이어 2연패를 거머쥐었습니다.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선 6개 부문(피아노·바이올린·첼로·목관·금관·성악) 중 3개 부문을 우승하여 K-클래식의 위상을 전세계에 과시하기도 했습니다. 그 영광의 주인공들은 바이올리니스트 김계희, 첼리스트 이영은, 테너 손지훈으로, 특히 바이올린과 첼로의 기악 부문 우승은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있는 일입니다.
이외에도 정인호가 성악 부문에서 공동 2위를, 박상혁과 이동열이 첼로 부문에서 각각 3위와 5위를, 플루티스트 김예성이 목관 부문 3위를, 예수아가 피아노 부문 4위를 차지하는 등 큰 성과를 이루었습니다.
1958년 모스크바에서 창설된 차이콥스키 콩쿠르는 명실상부한 세계적인 콩쿠르이나 현재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해 국제음악콩쿠르연맹에서 퇴출된 상태입니다. 하지만 그 위상은 여전하다고 볼 수 있지요. 여기서 문득 옛날 생각이 나는군요. 1974년 차이콥스키 콩쿠르 피아노 부문에서 정명훈이 공동 2위를 차지하고 귀국했을 때 김포공항에서 서울시청 앞까지 카퍼레이드를 벌였습니다. 훗날 1등 없는 2등이라는 소식이 오보였음이 밝혀졌지만(그해 1등은 나중에 여러 차례 내한 공연을 가진 안드레이 가브릴로프였죠), 그때나 지금이나 국제 콩쿠르에서의 우승은 올림픽의 금메달에 버금갈 정도로 국민의 관심을 끄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러한 콩쿠르를 두고 음악계에는 찬반양론이 팽팽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콩쿠르 수혜자이면서도 반대론자 중 한 명인 피아니스트 언드라스 시프는 "예술은 측정 불가능한 요소들로 이루어진 고도의 주관적인 영역이라 비교할 수 없으므로 콩쿠르 참가를 반대한다"는 입장을 공식적으로 표명했지요.
하지만 시프의 이러한 견해는 음악계의 현실을 무시한 이상론일 뿐더러, 만약에 콩쿠르가 없어지면 학연, 혈연, 지연이라는 연줄이 작용하는 '그들만의 리그'가 되어버릴 위험이 있다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김대진 한국종합예술학교 총장의 말대로 "연주자의 존재를 증명하고 인정받을 수 있는 통로가 현재로선 국제 콩쿠르의 입상 밖에 없다"는 점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제 생각에는 반대론자 편에 선 유명한 음악가들이 아카데미 등을 만들어 콩쿠르에 참석치 않는 젊은 음악가들에게 오디션 참여 기회를 주고, 그중에서 발탁하여 무대에 세우면 될 것 같아 보입니다만….
어찌됐든 우리의 젊은 음악가들은, K-팝 스타들을 키운 하이브나 SM 등 대형 엔터테인먼트 기업이 어린 영재들을 발굴하여 육성하는 시스템 없이, 오롯이 부모의 희생과 자신의 노력으로만 일구어내야 하는 현실에 처해 있습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앞으로도 그들은 어떠한 기업이나 정부의 체계적인 지원 없이 스스로 제 앞길을 개척해야만 한다는 것이지요.
물론 이런 어려운 과정 속에서도 젊은 음악가들이 가장 명심해야할 점은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술'(術,Technic)보다 '예'(藝, Art)가 먼저라는 점입니다. "악기를 다루는 테크닉과 재능보다는 예술가로서의 자질과 심성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함신익 지휘자의 말이 새삼 떠오르네요.
7월 중순, 두 명의 콩쿠르 위너들과 가진 식사 자리에서 저 역시 이 점을 또 한 번 느꼈습니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의 위너 김태한과 BBC 카디프 싱어 오브 더 월드의 위너 김성호는 세계적인 콩쿠르 우승자임에도 어찌 그리 겸손하던지요. 콩쿠르 우승 후의 첫 귀국이라 여기저기 부르는 데가 많은데도, 기대를 갖고 지켜본 이들에게 먼저 감사의 인사를 드리러 부지런히 다니는 그들의 행보에서 또 한 번의 감동을 느꼈습니다.
그간의 마음고생과 눈물을 하소연할 법 하건만 "그저 오래오래 노래를 불러 많은 관객들 가슴에 남고 싶다"고 말하는 소박한 희망도 참으로 인상적이었습니다. 대한민국에 설 무대가 마땅치 않아 외국 오페라 극장을 떠돌아다녀야 할지도 모르는 그들의 미래에 저부터 힘찬 응원을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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