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인 칼럼] 한반도, 단호한 냉정이 필요하다
김명인 | 인하대 국어교육과 교수·문학평론가
올해는 한국전쟁 정전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1953년 7월27일, 북한 인민군과 유엔군은 상호 교전을 잠시 멈추고 더 이상의 후속조치를 멈추어버렸고 그 뒤로 한반도에는 70년 동안 전쟁도 평화도 아닌 ‘비교전’이라는 모호한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그동안 국내는 물론 미국 내에서도 종전선언을 하고 평화협정을 체결하여 한반도와 동북아 평화를 회복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적지 않았으나 정작 정전 70주년인 올해의 한반도 정세는 점입가경이다. 이제는 명실상부 핵무기 보유국 지위를 갖게 된 북한은 거듭된 미사일 발사를 비롯한 무력시위로 날을 지새우는 모습이고, 남한 정부는 한·미·일 동맹을 통한 대북 강경대응 기조 속에 남북평화론자들을 반국가세력으로 몰고 북한흡수통일론자를 통일부 장관으로 앉히는 등 역대 정부가 추진했던 남북 대화협력의 기조를 바닥부터 뒤엎을 태세이다. 한반도는 평화체제는커녕 냉전체제가 해체된 지 언제인데 다시 열전 직전의 상태로 회귀하고 있다. 지금 한반도에는 그 언제보다도 냉정함이 필요한 시점이다. 뜨거운 대립이건 따뜻한 대화협력이건 어떠한 온기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차라리 적당한 냉기와 적절한 거리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전쟁 직후에야 피차 적대적 감정이 가라앉지 않았으니 통일도 흡수통일, 적화통일 외엔 다른 선택지가 없었겠지만, 시간이 지나고 냉전체제가 해체되는 국제적 추세까지 더해서 대화 협력을 통한 평화통일이 서서히 남북관계의 기조로 자리 잡아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1972년의 7·4공동성명 이래 반세기 동안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1991), 세차례에 걸친 남북 정상회담(2000, 2007, 2018) 등을 거치면서 더디고 때로는 위태로우나마 평화와 화해를 향한 행로가 진행되었고 그것은 어느 정도 불가역적인 것으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2019년 하노이 북-미 회담의 황당한 결렬을 통해 이런 인식은 매우 순진한 것이었음이 판명되었다.
한반도 상황에서 남북관계는 북-미 관계 변화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부차적 변수에 지나지 않는다. 80년대 후반부터 본격화된 남북 화해 모드가 미-소, 미-중 간의 탈냉전 화해 모드의 부록처럼 주어진 것처럼, 지금은 물론 앞으로도 남북 간의 어떤 접근도 미국의 승인 없이는 결실을 맺지 못한다. 따라서 정전 이후 70년 동안 북한을 적대시함으로써 동북아의 적절한 긴장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미국의 국익에 적합하다는 미국 주류 세력의 인식이 바뀌지 않는 한, 남북 간의 화해협력은 말할 것도 없고 한반도의 평화 정착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남북 간의 협력만으로 한반도 상황을 전환시키려면 남한의 정권이나 지도자가 국제적 파장과 고립을 감수하고 파격적인 대북 경협이나 투자 결정, 교통망 연결과 실제 운행, 상호 대표부의 개설 같은 모험을 저지르는 것 외엔 방법이 없다. 하지만 현재 한반도 남쪽에는 미국의 뜻을 거스르며 그런 모험을 할 만한 어떤 주체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갑자기 해가 서쪽에서 뜨는 일이 일어나 친북한정책이 미국의 이익에 적합하다는 판단 아래 미국이 전격적으로 북한과 수교를 하고 획기적인 협력을 추구하는 ‘미친 전환’을 하는 것 외엔 다른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북한 역시 미국으로부터 체제보장을 받고 정상국가로 인정받는 것이 유일한 목표이기 때문에 핵무장을 한다 탄도미사일을 쏜다 하며 미국을 자극하고 있는 것이다. 그간 남북협력을 통한 어떤 시도도 성공한 적이 없기 때문에 북한은 이제 절대로 미국의 뜻을 거스르는 자주적 결정을 하지 못하는 남한 쪽과는 대화할 의사가 없어 보인다. ‘사우스 패싱’은 이제 변수가 아니라 항수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지금처럼 북-미 관계의 동향만을 바라보며 속수무책이거나 현 정부처럼 미국의 대북강경책에 장단을 맞추는 것 외엔 다른 선택이 없을까? 상황이 달라지지 않으면 발상을 바꾸면 된다. 지난 70년 동안이나 지금이나 한반도 문제는 결국 북-미 간의 문제라고 한다면, 남한이 과감히 한반도 문제에 손을 떼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봉쇄 해제건 종전이건 평화협정이건 아니면 전쟁이건 미합중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둘이서 알아서들 해보라는 것이다. 한반도 문제는 북-미 문제이므로 대한민국은 손을 뗀다고 전세계에 선언하는 것이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몇가지 대담한 선택이 필요하다. 먼저 북한을 공연히 국가를 참칭하는 반국가단체로 인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독립된 이웃 나라로 인지할 것. 따라서 대한민국의 국토를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하는 헌법부터 개정하고, 당연히 국가보안법도 폐지할 것. 그러면 한반도는 공식적으로 남쪽에 대한민국(한국), 북쪽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조선)이라는 두개의 국가가 공존하는 공간이 되며, 현재의 휴전선은 그대로 두 나라의 국경이 된다. 미군 철수도 불가피하다. 다음, 북한에 우호적인 이른바 평화세력은 ‘우리 민족끼리’ 같은 감상적 통일론을 벗어버리고, 반공반북세력들 역시 세습왕조니 인권이니 하는 내정간섭이나 흡수통일 주장 같은 것을 더 이상 하지 말 것. 이미 북한 쪽에서는 이제는 남측, 남조선이라는 명칭 대신 대한민국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 부족하다. 기왕이면 ‘윤석열 역적패당’ 같은 내정간섭적 용어도 사용하지 않기 바란다.
그리하여 한반도의 남과 북에 있는 ‘한국’과 ‘조선’은 과거에 연연하지 말고 서로 국경을 접하고 있는 이웃 나라로서 서로 내정에 간섭하지 않고, 불필요한 충돌을 삼가면서 서로에게 적절한 거리와 예의를 지켜나가면 된다. 그러다가 시간이 가면서 서로 신뢰가 쌓이고 북-미 간에 어떤 유의미한 변화가 생긴다면 그때 가서 교류협력, 평화체제, 통일 같은 묵은 이야기들을 새로 시작해도 된다. 되지도 않을 불가능한 공염불을 하며 애를 태우는 것보다, 그리하여 정신적 물질적으로 막대한 낭비와 손실을 감수하는 것보다, 나는 이 방법이 훨씬 더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실질적인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몽상에 더 가까운가, 아니면 의지도 능력도 없으면서 지금 흡수통일을 해야 한다거나 평화체제를 수립해야 한다거나 말하는 게 더 몽상에 가까운가. 지금 한반도에 필요한 것은 지루한 열정이 아니라 단호한 냉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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