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권일의 다이내믹 도넛] 어떤 지옥은 필요하다

한겨레 2023. 8. 3.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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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권일의 다이내믹 도넛]

게티이미지뱅크

박권일 | 독립연구자·‘한국의 능력주의’ 저자

고등학교 문예반 시절,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사르트르의 말을 시에 쓴 적 있다. ‘중2병’이 고1까지 지속된 탓인데, 당시 합평회에서 친구들이 감탄하며 따라 읊조리던 걸 떠올려보면 그들 역시 같은 환우였던 게 분명하다. 정작 그 문장이 실린 사르트르의 희곡 ‘닫힌 방’을 읽은 건 스물몇살 때였던 것 같다. 그제야 알았다. 사르트르는 단순히 타인이 지옥임을 선언한 게 아니라, 타인이라는 지옥에 갇혀 있음에도 우리는 벗어날 수 없으며 심지어 기회가 주어져도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읽은 당신은 이렇게 투덜거릴지 모른다. “대체 이 사람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거야? 웹툰 얘긴 줄 알았더니….” 맞다. “타인은 지옥이다”는 어떤 세대에겐 웹툰과 드라마 제목으로 더 익숙하다. 이 작품은 고시원이 배경인 스릴러다. 처음 나왔을 때 제목과 배경의 절묘함에 나 역시 무릎을 쳤다. 가장 비인간적인 주거 공간인 고시원이야말로 타인이 지옥이 되는 곳이니까. 80년 전에 쓰인 저 말이 이렇게 계속 소환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오늘날 우리가 타인을 점점 더 지옥으로 느끼며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일상에서 마주치는 ‘민폐’ ‘진상’들과 선을 넘는 ‘갑질’들은 미디어를 타고 순식간에 공유된다. 그런 서사의 홍수 속에서 우리 삶은, 타인이 언제든 좀비처럼 튀어나와 목덜미를 물어뜯을지 알 수 없는 포스트 아포칼립스물(세계 멸망 이후 생존자의 삶을 다룬 창작물)이 된다. 인터넷이 대중화됐을 때 전문가들은 우리가 더 많은 타인과 만나고 그들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거라 주장했다. 돌아보면 참 맑고 순수했던 시대였다. 오늘날 인터넷은 삶이 얼마나 공포스러운지, 타인이 얼마나 괴물인지 매 순간 확인하며 전율하는 현장이다. 소셜미디어는 어떨까. 경제학자 파비오 사바티니와 프란체스코 사라치노의 논문에 따르면, 페이스북은 사회 자본을 늘리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페이스북은 사회 자본을 만들까, 파괴할까? 온라인 상호작용이 신뢰와 네트워크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경험적 연구’) 그런데 페이스북은 전혀 몰랐던 타인을 알게 해준다기보다 기존 지인이나 집단과의 결속을 강화하는 경향을 보인다. 중요한 건 내집단, 즉 자기가 속한 집단에 대한 신뢰가 올라가는 동시에 외집단에 대한 불신도 강해진다는 점이다.

물론 하나의 연구로 결론 내릴 단순한 문제는 아니지만, 끼리끼리 모이는 문화나 미디어 환경이 배타성을 강화하기 쉬운 조건임은 부정하기 어렵다. 예전엔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장소에서 우연히 낯선 사람들과 대화하는 일이 흔했다. 이 분야 최고의 달인은 그야말로 스며들듯 말을 붙이는 넉살 좋은 할머니들이다. 반면 젊은 세대일수록 그런 접촉을 기피하며 심지어 전화 통화도 거부감을 느끼는 경우가 적지 않다. 물론 우연한 만남은 언제든 무례한 간섭이 될 위험이 있다. 하지만 그렇게 예측 불가능한 만남이기에 가치가 있다. 그런 만남에서야말로 인간은 새로운 깨달음을 얻고 인식을 확장한다. 일어날지 모를 불쾌함을 피하기 위해 움츠러드는 것, 그런 태도가 모두에게 내면화되는 상황이 가장 나쁘다.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는 시민들이 소극적 자유만 추구하면서 친밀성의 내적 영역으로 도피하는 경향을 ‘사사화’(privatization)라고 이름 붙였다. 그는 이것이 결국 공적 공간과 시민적 자유를 파괴한다고 경고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하나의 대안은 ‘진정한 소셜 믹스’다. 소셜 믹스는 보통 아파트 단지 내에 분양 세대와 임대 세대를 함께 조성하는 정책을 의미하는데, 사실 이는 소셜 믹스라기보다 ‘하우징 믹스’에 가깝다. ‘고립의 시대’가 심화하며 만들어내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해가기 위해서는 그 정도 수준을 한참 넘어서야 한다. 요컨대 ‘가슴이 웅장해질 정도로 장대한 사회적 뒤섞임’이 필요하다. 만나기 싫은 사람을 억지로 만나라는 게 아니라 타인과 우연히 마주칠 기회를 많이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온라인으로 거의 모든 일상을 해결할 수 있는 시대이기에 더더욱, 익명의 타인을 직접 마주할 기회를 인위적으로라도 만들어내는 게 절실하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주류-정상에서 벗어난 이상한 사람과 아픈 사람, 떼쓰고 시끄럽게 떠드는 아이들을 더 많이 만나게 될 것이다. 그건 필시 부작용이 속출하는 타인의 지옥일 테지만, 각자도생과 고립의 지옥에 비하면 훨씬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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